[정동칼럼] 존엄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정
어머니는 2월에 말기암 선고를 받고 11월에 돌아가셨다. 그사이에 제일 크고 ‘잘 본다’는 병원 세 군데에서 진단과 항암치료를 받았고, 고향의 한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다.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첫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는 여명이 6개월 정도라 했지만, 60대 중반의 나이였고 진단을 받기 전에는 건강한 편이었기에 환자 본인도 가족들도 ‘최선’을 찾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치료의 방향이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에 대처하는 일은 매일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환자 본인에게 암 진단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리고 친지들로부터 온갖 묘방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용하다는 소개에 솔깃해서, ‘카드 결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찬(?) 선언과 함께 진료를 시작하는 서울 종로구의 모 한의원에서 폐 전이에 좋다는 약을 지은 일도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때는 2004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법)도 없었다. 호스피스 병원이 뭔지도 잘 몰랐다. 뭔가 상당히 ‘미개’했지 않은가? 그때에 비하면 한국사회의 ‘죽음의 질’은 많이 나아졌을까?
장인은 뇌졸중 발병 후 10년쯤 투병하다 요양원을 거쳐 요양병원에서 2018년에 돌아가셨다. 면회 가서 본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풍경을 잊기 어렵다. 특히 경기도 신도시의 대형빌딩 10층의 크고 환한 병실에 중증뇌질환 또는 뇌수술 후 연명치료를 받는 환자들 수십명이 고요히 줄지어 누워 있던 모습과, 중·고생들 다니는 학원, 카페와 식당, 손톱·피부 미용업체 등등이 함께 입주해 있는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통해 시신이 옮겨지던 모습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었다. 욕망과 생존경쟁의 전장에서 죽어라 뛰다, 결국 쓰러져 억지로 사는 (또는 죽는) 육신들이 병치된 광경은, ‘도시 지옥도’로서는 부족한 데가 없었다.
한국은 ‘제3세계’의 부자들뿐 아니라 버젓하게 잘 사는 외국 교포들도 ‘의료 쇼핑’을 오는 의료 선진국이며 세계 최장수 국가다. 그러나 속내는 공허하고 비통하다. 한국사람들의 상당수는 길고(고용불안과 빠른 퇴직), 외롭고(1인 가구의 급증), 아픈(건강수명과 기대수명의 차이) 노년을 겪다가 쓸쓸하고 비인간적인 죽음을 맞는다.
요즘은 부고를 들으면 고인의 마지막 날들이 궁금하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투병하다 누구 앞에서 숨을 거뒀는지. 혈액 투석이나 기관지 절제는 하셨는지. 유서나 유언을 어떻게 남기셨으며, 연명의료 여부를 (가족들이) 어떻게 결정했는지. 이는 한 인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또 이 사회가 어떤 덴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물론 한국에서 그것은 ‘돈’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을까. 치열한 경험과 지식의 공유와 토론이 필요한 일 아닌가.
와중에 노년자살, 고독사, 간병살인 같은 극단적 비극도 계속 벌어진다. 출생률이나 자살률과 비슷하게, 한국사회와 국가는 문제를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기득권과 일부 종교세력의 힘에 맥없이 진다. K연명치료와 돌봄체계의 수준은 젠더, 노동, 이주의 현실을 여실히 반영한다. 이 문제에서도 우리 중산층은 가련한 헛똑똑이다.
‘시설’에 갇혀 손발이 묶이고, 콧줄 소변줄 달고, 수백 수천만원을 쓰며 ‘벽에 ○칠하도록’ 명줄을 늘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길게 산 진지한 노인들은 누구나 ‘자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 한다. 이 소망은 애처롭고 절실하다. 그러나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인간은 죽음을 조절할 수도, 연습할 수도 없다. ‘자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은 내 목숨을, 초라한 현행 연명의료법과 가진 돈의 액수에 따라 맡기고 수동적으로 요행을 바란다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민주당 안규백 의원이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상당히 진일보한 내용을 담은 법이며, 근래 급격히 변한 존엄사와 웰다잉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와 의사들은 존엄사법이 시기상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돌봄 체계와 죽음문화의 수준이 엉망진창인데 존엄사법부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다. 예컨대, 임종과정과 연명의술에 대한 가장 온건한 형태의 자발적 의사 표시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도 매우 어렵게 돼 있다. 필자가 사는 서울 은평구 인구는 약 48만명인데, 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기관은 딱 세 곳이다. 직접 가서 해야 한다.
그러니까 돌봄체계의 재구축과 연명의료법 개정은 상보적이며, 둘 다 시급해보인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숭배 애도 적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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