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덕의 귀농연습] 반도체에 ‘올인’하는 나라
지난해 봄 대만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다. 중부 쩡원, 남부 바오산 등 저수지 대부분이 바닥을 드러냈다. 대만 정부는 논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막고 이를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 등의 생산공장으로 돌렸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세정·연마·절단 작업 등에 물 수십만t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만 농지의 5분의 1에 달하는 7만4000㏊에 물 공급이 중단되자 한 농민이 말했다. “(대만에서) 농부가 되는 건 정말 최악이야. 비료값도, 농약값도 점점 비싸지고 있어.” 미국 뉴욕타임스는 “대만 사람들은 벼농사가 이 섬(대만)과 세계 모두에게 있어 반도체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서 “ ‘하늘’과 ‘거대한 경제적 힘’이 대만 농부들에게 다른 직업을 찾아볼 때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남의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경기도 평택·기흥·화성·이천·용인의 농지는 일찌감치 반도체 공장 부지로 바뀌었고, 공장마다 엄청난 양의 물을 팔당댐에서 끌어오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은 생산라인(1~3라인)에서 매일 하루 물 22만t을 끌어다 쓴다. 향후 4~6라인이 추가로 만들어지면 하루 25만t이 추가로 필요하다. 희귀한 자원을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가. 선택의 순간이 오면, 한국에서도 ‘산업의 쌀’이 진짜 쌀을 대체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도체와 달리 농업대책 속빈 강정
“반도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 거야.” 물을 대지 못해 농사를 포기한 70대 대만 농부의 말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한국과 대만은 전 세계가 만든 ‘글로벌 공급망’의 수혜자이다. 스스로가 반도체 공급망의 중요한 일원이 돼 돈을 벌었고, 식량은 미국·중국·호주·우크라이나·러시아·브라질 등으로 구성된 식량 공급망을 통해 싼값에 구했다. 최근 반도체 업계가 “향후 10년간 3만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에게 “과외선생을 붙여서라도 반도체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한 건 지금의 ‘반도체 공급망’을 유지해야 미래에도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술강국’ 한국을 만들어냈던 글로벌 공급망의 한 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후위기로 곡물 생산량이 감소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곡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식량 수출국들은 밀 등 식량의 해외 수출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이쯤 되면 ‘반도체 대책’과 함께 ‘농산물 대책’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전 국토 중 농지는 최소한 얼마만큼 유지해야 할지, 농업 기반을 유지하려면 현재 1만가구뿐인 40세 미만 청년 농가의 수를 얼마나 늘려야 할지, 수십년째 연 1000만원 언저리인 농업소득을 어떻게 높일지…. 이런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아닐까. 전북 장수의 한 농민이 내게 말했다. “농업은 진작에 위기를 맞았지, 다른 산업이라면 정부가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까. 반도체에 쏟는 관심의 반의반만이라도 농업에 주면 안 되나.”
식량 공급망도 반도체 공급망만큼이나 복잡해서 종자·농약·비료·생산·운송 등 각 분야의 ‘플레이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만큼 세밀한 정책이 들어가야 하는데 정부의 농업대책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예컨대 지난해 사료 가격 상승으로 젖소 농가의 원유 생산비가 크게 뛰면서 우유 소비 가격이 자동 인상되자, 농림축산식품부는 원유 생산비를 반영해 가격이 결정되는 ‘원유 가격 시스템’을 뜯어 고치겠다고 선언했다. 사료 수급의 불확실성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국처럼 가축 사료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은 비상시에 대비해 사료를 비축하고, 우유 유통마진을 줄이는 방식으로 우유 가격 인상에 대비한다.
반도체 올인은 유효 전략 아닐 수도
다들 반도체만 바라보는 사이에 누군가는 다른 곳을 주목한다. 22일 경향신문이 주최한 <2022 경향포럼>에 참석한 제이슨 솅커 퓨처리스트 인스티튜트 의장은 저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들이 미래에 필수적인 인력과 그렇지 않은 인력이 무엇인지 갑론을박하는 사이 놓치고 있던 주제가 바로 농업이다. 농업이야말로 전형적인 필수산업이다. 먹을 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반도체에 ‘올인’하는 건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아닐 수도 있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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