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34] '밴조의 왕' 최리차드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2022. 6.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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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리차드(Richard Chang Choy)의 사진과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 매우 놀랐던 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현악기 밴조(banjo) 연주자인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 2세였다. 그가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 1933년에 당시 언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랑 중의 하나인, 가지고도 몰랐던 밴조 왕’ 또는 ‘조선이 낳은 천재적 밴조이스트’라며 그를 극찬하였다.

1933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고국 공연을 앞둔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최리차드)이 머무는 조선호텔로 밴조라는 악기를 좀 보여 달라는 성미 조급한 여자가 어제 하루에만 십여 명, 사인을 청하러 오는 남자도 상당히 많아 연습으로 인하여 굳게 닫아건 군의 방문을 노크하였다. 이렇듯 시정(市井)의 인기는 높을 대로 높아져 있는데 이윽고 이날이 오늘 밤이라. 저무는 봄, 반도 악단에 새로운 기록적 이채인 동시에 일대 성회(盛會)를 이룰 것이다.”

관련 자료를 종합해보면, 한국 이름 최창선(崔昌善·또는 최창춘)인 그는 하와이 마우이에서 1906년 9월 2일에 출생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의 아버지 최정호(崔正浩)는 1903년에 하와이에 이주한 한인 이민자 1세대였다. 시카고에서 전기 공학 학교를 졸업하고 라디오 공장에서 일했던 최리차드는 밴조를 연주하는 시각장애인을 보고 밴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밴조 연주자로 유명한 해리 레저(Harry Reser)의 수제자가 되었다. 1930년 시카고 음악 무역 센터에서 열린 대회에서 1등을 한 그는 ‘밴조의 왕(Banjo King)’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미국 전역과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를 돌며 연주하다 1933년 고국에 들어온 그는 약 4개월 동안 평양·신의주·목포 등 전국을 오가며 연주회를 열었다.

“조선에서는 돈을 벌기보다는 우리의 동포들을 친히 만나 위로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던 그가 취입한 음반 중 ‘조선아 잘 있거라’는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금지 처분을 받아서 지금 그 곡의 실체는 알기 어렵다. 다만 잡지 ‘신여성’ 1933년 7월호에 윤석중이 작사하고 최리차드가 작곡한 ‘작별의 노래’가 실려 있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꿈에도 생시에도 잊지 못한 내 고향/어이 하리 찾아오니 낯선 사람뿐일세”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최리차드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18)이 제16회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음악인들을 보며 지금은 잊힌, 하지만 세계적으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연주자 최리차드의 삶을 여기에 기록하여 그를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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