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슬픔을 좋아하는 사슴여인

방호정·작가 2022. 6.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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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LP바에서 함께 일했던 프랑스인 친구가 있다. 노르망디에서 온 이 친구는 해바라기, 조덕배, 산울림, 강산에, 송골매의 노래를 좋아해 시종일관 가사까지 정확하게 따라 부르곤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새로 발견한 노래에 꽂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 열창을 했는데, 그 노래는 장덕의 ‘사슴여인’이었다.

프렌치 감성이 더해져서 그런지 그 친구가 부르는 ‘사슴여인’은 어쩐지 센강변에서 흐르는 샹송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전염되어 버렸는지 지금도 문득 슬픔이 밀려오면 ‘나는 슬픔을 좋아하는 사슴여인’이란 구절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세상에, 슬픔을 좋아한다니. 슬픔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지만, 생각보다 세상엔 슬픔을 좋아하고 즐기는 이들이 가득한 것 같다.

특히 한국인들은 슬픔을 즐기는 성향이 유독 강한 것 같다. 나날이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유행 따윈 아랑곳없이 예나 지금이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여전히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는 슬픈 발라드 노래들만 봐도 그렇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있는 힘껏 돈 자랑, 차 자랑 하며 ‘스웩’을 보여주던 래퍼들도 결승에 가까워지면 마치 필살기처럼 구슬픈 사연들을 풀어헤친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종일 쿵짝쿵짝 신명나게 흐르는 디스코 메들리 역시 귀 기울이면 서글픈 멜로디와 안타까운 사연이 가득한 경우가 많다.

슬픔을 좋아하는 것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DNA인 듯하다. 현인 선생의 노래도 BTS의 노래도 표현은 다르지만 제각각 슬픔을 담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이런 슬픈 DNA를 담은 K팝이 다양한 슬픔에 빠진 세계 인류를 다독거리며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정현종 시인은 ‘영원한 것은 슬픔뿐이다’라고 했다. 길바닥에 넘치고 차일 정도로 흔하지만 영원하기까지 한 슬픔을 즐기고, 무한동력에 가까운 에너지로 활용하는 건 슬프지만 꽤 스마트한 생존 전략인 것 같다. 하지만 식이섬유와 단백질, 비타민 풍부한 식단을 챙기며, 체력 안배해가며 조금씩 살살, 쉬어가며 오래오래 슬퍼하면 좋겠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슬픔뿐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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