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뒤늦게 읽는 윤중호의 시

김용출 2022. 6. 23. 00:1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저녁 산 그림자가 선원 마당에 반쯤 내려왔을 즈음, 시인 윤중호는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대화를 제대로 잇지 못하던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던지려는 듯 친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문학평론가 고 김종철이 '철저한 비근대인'으로 부른 시인 윤중호와 그의 시 세계를, '문학의오늘' 봄호에 실린 임우기의 평론 '비근대인의 시론'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됐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비근대인'.. 작고 18년 만에 재조명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저녁 산 그림자가 선원 마당에 반쯤 내려왔을 즈음, 시인 윤중호는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대화를 제대로 잇지 못하던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던지려는 듯 친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꼼짝 없이 죽게 되었어.”

친구인 문학평론가 임우기는 어둑해지는 절간 옆 공터에서 시인에게 투병 의지를 잃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돌아섰다. 뜨거운 햇살이 들녘의 벼들을 노랗게 물들인 2004년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친구의 간절한 당부에도, 시인은 얼마 후 그해 9월 서둘러 먼 길을 떠났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잡지 ‘녹색평론’을 창간한 문학평론가 고 김종철이 ‘철저한 비근대인’으로 부른 시인 윤중호와 그의 시 세계를, ‘문학의오늘’ 봄호에 실린 임우기의 평론 ‘비근대인의 시론’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됐다. 다시 무지의 민낯을 본 절망 반, 뒤늦게 알게 된 아쉬움 반.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자 지면을 통해 시인 윤중호를 조금 소개한다.

윤중호는 1956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고 1984년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잡지사 기자와 출판 편집자 등의 일을 하면서 시를 썼다. 1988년 친구 임우기의 제안과 권유에 따라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를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펴냈다. 당시 문학과지성사의 사실상 좌장 역할을 하던 문학평론가 김현이 비평적으로 윤중호의 첫 시집을 높이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윤 시인은 이후 ‘금강에서’(1993), ‘청산을 부른다’(실천문학사)를 차례로 펴냈지만, 2004년 췌장암으로 타계했다. 이듬해 유고시집으로 ‘고향 길’이 출간됐다. 숭전대 영문과 시절 스승이던 김종철은 당시 유고시집 발문 ‘우리가 모두 돌아가야 할 길’에서 윤중호 시집이 “한국 현대시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드물게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며 “크게 보면 백석의 ‘사슴’이나 신경림의 ‘농무’의 맥을 잇는 세계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그 시집들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면서 시인 윤중호를 “사람을 아끼는 게 제일이라는 믿음에 투철했고, 무엇보다도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 철저한 ‘비근대인’이었다”고 평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해 전부터 윤 시인과 그의 작품 세계를 주목하거나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출판사 솔의 대표이기도 한 임우기 역시 지난 봄 지인들과 함께 ‘윤중호 시선집: 시’(솔)를 펴냈다. 그의 시집이 모두 절판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 세계가 한국문학사에서 재조명돼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고 18년 만이다.

기자는 그 동안 뭐 했는지, 참. 뒤늦게야 윤 시인을 만나게 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의 대표시를 읽는다. 제목은 ‘詩(시)’다. 엄니도 행상길도 아닌.

“외갓집이 있는 구 장터에서 오 리쯤 떨어린 九美(구미)집 행랑채에서 어린 아우와 접방살이를 하시던 엄니가, 아플 틈도 없이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다 해지게 걸어 다녔다는 그 막막한 행상길./입술이 바짝 탄 하루가 터덜터덜 돌아와 잠드는 낮은 집 지붕에는 어정스럽게도 수세미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강 안개 뒹구는 이른 봄 새벽부터, 그림자도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밤까지, 끝없이 내빼는 신작로를, 무슨 신명으로 질수심이 걸어서, 이제는 겨울바람에, 홀로 센 머리를 날리는 우리 엄니의 모진 세월.//덧없어, 참 덧없어서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시> 전문)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