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어깨동무체 '원훈석'

이기수 논설위원 2022. 6. 2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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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해 6월4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원훈석 제막을 마친 뒤 박지원 전 국정원장(오른쪽)과 개정된 국정원법을 새긴 동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원훈석의 글씨는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어깨동무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가정보원이 원훈(院訓)을 바꾸려고 직원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한다. 6번째 원훈 교체다. 첫 원훈은 1961년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이 원훈은 1998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휘호를 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불행했던 안기부 역사의 표본이 바로 나”라며 다신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했다. 그 원훈은 2008년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2016년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창설 60주년인 지난해 6월 ‘국가와 국민을 위한 무한한 헌신’으로 고쳐졌다. 그러곤 꼭 1년 만에 국정원 내 원훈석 교체 움직임이 재연됐다. 가을을 알리는 오동잎처럼, 원훈석이 정권교체 시금석이나 전리품이 된 듯싶다.

역대 원훈은 공통점이 있다. 숨은 일꾼을 강조한 ‘음지’는 ‘무명’과 ‘소리 없는’으로 이어졌고, ‘헌신’이란 글자가 애용됐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성경 문구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영국 비밀정보부(MI6)는 ‘모두 비밀로’, 중국 국가안전부는 ‘당에 충성’이 모토이다. 저마다 정보기관 특징이 보이지만, 다른 것은 하나다. 한국만 자꾸 고치는 것이다.

이번 교체 논쟁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글씨체를 원훈석에 새긴 문제로 촉발됐다. 스스로는 육사 교관 시절 지하정당인 줄 모르고 반독재 잡지(청맥) 모임에 참여했다고 한 사건이다. 20년 감옥 생활 중에 완성한 그의 ‘어깨동무체’는 획이 굵고 둔탁한 글자가 어깨동무하듯 이어져 힘있고 조화롭고 서민적이다. 소주 이름 ‘처음처럼’으로 눈에 익고, 무료로 보급된 글씨체다. 2014년 12월 그가 쓴 ‘대통령기록관’ 현판도 보수단체의 문제 제기로 떼어진 적 있다. 보수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색깔 공세가 벌어지는 셈이다.

국정원은 과거 중정·안기부 시절 정치 개입·인권 유린·정권 보위에 앞장섰고, 이명박 정부에선 댓글공작 진원지였다. 2020년 말에야 국내 정보 수집을 직무범위에서 없애는 전환점을 맞았다. 개혁은 반성과 내려놓기로 시작된다. 국정원 직원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단어 ‘양지’가 힘있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길 바란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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