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목욕탕도 못 가겠네".. '식민지 백성' 차별의 역사

2022. 6. 2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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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일본손님 오면 인사하고 조선손님에겐 '입욕' 주의 도로청소·전등·물건값까지 차별, 봉급도 극과 극 식민지배 끝난지 오래지만 지금도 나아진 것 없어

차별(差別)과 구별(區別)은 서로 다르다. 차별은 둘 또는 여럿 사이에 차등을 두어 구별함을 뜻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차별을 당했다. 무조건적인 차별은 어찌보면 '숙명'이기도 했다. 100년 전 그 서러웠던 차별 이야기를 찾아가 본다.

1921년 2월 19일자 매일신보를 보자. "지금 걸핏하면 일선인(日鮮人) 차별 철폐니, 무엇이니 하여도 모두 허언(虛言)에 지나지 못한 모양이지요. 일전에 시내 수표정 국수탕이라는 목욕탕에 간 즉, 일본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왜 그렇게 건방진 지, 일본인이 오면 머리를 조아리고 인사하고, 조선인이 오면 인사는 고사하고 입욕(入浴)에 대하여 일장 주의를 시키고, 갈 때는 일본 사람의 경우 게다를 현관에 내려주면서, 조선 사람에게는 그러한 일이 없으니..."

목욕탕에서의 차별은 자주 신문 지면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1922년 3월 23일자 매일신보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려있다. "목욕탕에서까지 내선인(內鮮人)을 구별하여 어떠한 곳에서는 전혀 조선인이라면 들이지를 아니하고, 또 어떠한 곳에서는 일본인이 씻은 후에 들이는 폐단이 많이 있음에 (중략) 어제 3월 22일에 각 경찰서장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단속해 실적을 보고하라 전달했고 목욕하는 사람의 주의할 건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는데…"

목욕탕 뿐 아니라 차별은 여러 곳에서 은연 중에 행해졌다. '길에 물 뿌리는 것도 조선인은 차별'이라는 제목의 1922년 5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평양부청에서는 여름이면 시가(市街)에 물을 뿌리는데, 일본인이 많이 사는 신시가(新市街)에는 다섯 번을 뿌리면 조선인이 많이 사는 구시가에는 한 번도 어렵다고 평양 시민의 불평이 많다."

심지어 전등(電燈)에도 차별을 두었다. "진주전기주식회사는 그 경영이 일본인의 손에 있으므로 종래 조선 사람에게는 전등을 잘 달아주지 아니하여 일반 시민의 불평이 적지 아니 하였다. 잡화상을 경영하는 모(某) 상회는 여러 번 전등의 가설을 교섭하였으나 마력(馬力)이 부족하다 하여 임시등 몇 촉을 가설하였는데 (중략) 지난달에 와서는 가설하였던 전등을 다 떼어가서 그 상회는 일시에 암흑세계가 되고 말았다는데 (중략) 요사이에도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상점에는 전등을 달아주는 것을 보면 결코 마력이 부족하다는 말도 믿을 수 없는 것이요, 전등에도 무슨 차별이 있는 듯하다고 말하더라." (1922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

뿐만 아니다. 물건 값에서도 차별이 있었던 모양이다. 1922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받는다'는 제목의 기사다. "대전 지방에서 요사이 일본인 상점의 조선 사람에게 대한 불친절은 그만 두고라도 물건 값을 속여 몇 곱씩 받는다 하여 민간의 불평이 날로 심해 오던 터인바, 모 상점에서는 시가(市價) 25전 하는 물건을 조선 사람에게는 35전을 받은 일도 있고, 모 금물전(金物店)에서는 철물을 팔 때 조선 사람에게는 자로 재서 길이로 팔고, 일본인에게는 저울로 달아 판다는데, 조사한 즉 저울로 달면 3전 5리요, 재서 속여 팔면 20전을 받게 된다는데, 당국에서는 이 부정 사실을 이제부터 발견하면 엄중히 처벌하리라더라."

조선인 관리에 대한 차별 대우도 심했다. 1922년 4월 4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일선(日鮮) 면장(面長) 대우 차별'이란 기사다. "황해도의 수부(首府)인 해주면의 면장이 바꿨다는데, 조선인 면장 원용석(元容奭)씨에서 이번에 돌연 해주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오키모토(沖本)로 바뀌었는데, 윤용석씨는 봉급이 불과 50원인 고로 면장 체면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터인데, 이번 일본인 면장은 봉급을 일약(一躍)하여 월 200원에 교통비 연 300원이라는 거액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한다. 이 비용은 어느 곳에서 나오는 지, 임명한 도(道) 장관의 사유재산에서 지출하는 것도 아니요, 총독부 행정비목에서 지출하는 것도 아니라, 즉 해주 면민의 재산의 일부에서 갹출(醵出)할 터인 즉, 일선인(日鮮仁) 면장 간의 차별 대우도 가증(可憎)하려니와 맹종적(盲從的)인 면민의 부담 증징(增徵)이 또한 가탄(可歎)할 일이라더라."

이런 차별로 조선인 관리 7명이 동맹 사직한 사건도 있었다. "전라남도 보성군청 재무과에서 조선인 재무과장 왕종성(王宗性)은 일본인 군속(郡屬)에게 결산보고를 만들어 보내라 했더니 그 일본인이 불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성을 내 말다툼이 일어나 왕(王)과장의 덜미를 세 번이나 쳤다. 이에 조선인 과장이라고 일본인 부하가 복종하지 아니 함은 조선인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라 하여 조선인 직원 일동 7명은 모두 사직하기를 선언했다고 한다." (1922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이런 차별은 특히 압록강 철교를 매일 통과하는 수만명의 조선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두통(頭痛)인 여행증명서(旅行證明書)'란 제목의 1921년 6월 21일자 매일신보를 기사를 보자. "매일 철교 양쪽에 경관 몇 명씩 우둑하니 서서 오고가는 조선인을 불러가지고는 여행증명서가 있고 없는 것을 조사하여, 그 증명서를 가지지 않았으면 한 사람이라도 통행을 허락지 않는 것이 그네들의 직무라. (중략) 의주에서는 안동(중국 단동)으로 외상값 같은 것을 받으러 가더라도 여행증명이 없고 보면 그 다리는 건너가지 못하는 법이 되어서, 오죽하면 일본 사람의 눈에도 참으로 동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당국이 매일 철교를 통과하는 조선인의 고통에 동정을 줄 생각을 하고, 여행증명을 철폐하여 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좀 편한 법을 베풀어서 관대한 조치를 하기를 바란다는 신의주 방면의 일반 조선동포의 부르짖는 소리이다."

식민지 시대의 차별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우리끼리는 그러한 차별이 없을까. 그런 차별은 그 어떤 차별보다 훨씬 가슴 아픈 '차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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