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이 이끈 1990년대 김건모·클론·박미경, LP로 듣는다

이재훈 2022. 6. 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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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신승훈·노이즈 제작자
가요황금기 이끌어…하우스·레게 국내 알린 선구자
한국음악콘텐츠협회 회장 맡아 음악산업 생태계 조성 일궈

[서울=뉴시스] 김창환 회장. 2022.06.22. (사진 =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가요 황금기'로 통하는 1990년대 대표 프로듀서 겸 작곡가는 명실상부 김창환(59)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옛 라인음향) 회장이다.

그가 제작한 명반들이 LP로 부활한다. 김건모 정규 1집·3집, 클론 1집, 박미경 2집이 시작이다. 뒤를 이어 노이즈 등 당대를 풍미한 가수들의 음반이 LP로도 나온다. 음반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사운드트리'와 손을 잡았다. 이르면 8월부터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1990년대 가요계는 '라인음향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대의 솔로가수 시장을 양분한 신승훈·김건모를 비롯 노이즈, 클론, 박미경 등 수퍼스타들이 이 회사를 통해 발굴됐다.

김 회장은 1990년 신승훈의 1집 '미소속에 비친 그대'를 신호탄으로 앨범 제작에 뛰어들었다. 프로듀서로서 뿐만 아니라 신승훈 '날 울리지마', 김건모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핑계' '잘못된 만남',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 등 시대를 풍미한 히특곡을 만들며 걸출한 작곡·작사가로도 자리매김했다. 홍경민, 이정, 채연 등도 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연예인 이상의 위상을 자랑하던 클럽 DJ 출신인 그는 하우스·레게·레이브·테크노 등 이전 국내 대중음악과 차별화된 음악을 국내 소개하며 트렌드를 이끌었다. 한 때 '김창환 사단'은 가요계 흥행과 완성도의 보증수표였다.

라인음향이 당시 이런 위상을 가졌던 이유 중 하나는 뮤지션 존중 문화. 소속 가수들에게 회사지분이 있고, 음반 판매량에 따라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게 했다. 1980년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됐던 음악 기획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최근 발간된 한국 팝 사서(史書) '한국 팝의 고고학' 1990년대 편(신현준·최지선·김학선 펴냄)에선 라인음향의 '인하우스 시스템'을 주목했다. 인하우스 시스템은 사무실·작업실·녹음실·연습실 등을 구비하고 작곡·프로듀싱·안무 등의 모든 작업이 한 건물 안에서 이뤄지는 조직형태를 가리키는데, 우리 대중음악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다.

[서울=뉴시스] 김창환 회장. 2022.06.22. (사진 =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최근 방배동 미디어라인에서 만난 김 회장은 지금도 젊었다. 세련된 감각 그리고 음악에 대한 넘치는 열정이 여전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1990년대 제작하셨던 일부 음반을 LP로 다시 내놓으시는데요. 요즘 LP가 MZ세대에도 인기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LP를 내놓은 게 1995년 김건모 3집 '잘못된 만남'이 마지막이었어요. 당시 한정판 5만장만 찍고 '영원히 엘피는 안 찍을 거다'라고 했죠. 당시엔 CD의 편리함에 졌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아날로그 열풍 속 LP에서 재미를 찾은 거 같아요. 저희 386세대가 LP를 선호했던 이유는 음질 때문이었는데, 지금 세대는 감성 때문에 선호하죠."

-프로듀서로 일하기 전, 1980년대 주로 LP로 음악을 틀었던 디스코텍 '스튜디오 80'의 DJ로도 큰 인기를 누리셨죠?

"당시 대한민국은 록 음악 위주였어요. 팝 프로그램들도 비틀스·레드 제플린·딥 퍼플·핑크 플로이드 등 록 음악을 주로 틀었죠. 그런데 스튜디오 80에 가서 솔(Sou) 음악을 처음 들은 거예요. 제겐 충격이었습니다. 록도 좋았지만 제 감성은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디제잉을 하게 된 거죠."

-DJ를 하면서 섭렵하신 음악이 1990년대 음반을 제작하면서 분출된 건가요?

[서울=뉴시스] 김창환 회장. 2022.06.22. (사진 =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하우스, 레게 등을 선보였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음악인지 몰랐죠. 그래서 음반을 사시는 분들에겐 이 곡들에 대해 알려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노래 제목 옆에 괄호를 치고 장르를 다 쓴 거예요. 예컨대 김건모 음반을 보면 '핑계'는 '레게', '어떤 기다림'은 '하우스' 이렇게 다 기재를 했어요. 당시엔 음반을 사면 크레디트를 다 보던 시기였거든요. 그렇게 새로운 장르에 대중이 익숙해진 거죠."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하셨던 건가요? 마돈나 데뷔 앨범 '홀리데이' 프로듀서가 DJ 출신 젤리빈인 걸 알고 프로듀서를 꿈 꾸셨다고요.

"당시 DJ가 연예인 이상이었어요. 돈도 연예인보다 잘 벌었죠. 나이트 클럽의 DJ, 클럽의 DJ와는 달라요. 쉽게 말하면 가수 비(정지훈)가 우리였죠. 그런데 인기가 오래 안 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서른살이 되면 젊음이 사라질 텐데, 더 이상 젊은 친구들이 우리에게 열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 제가 곡을 잘 썼거든요. 그래서 젤리빈처럼 프로듀서가 돼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 댄스 음악이 인기가 많지만 음반은 잘 안 나가는 시대였어요. 해바라기·이문세·변진섭·조덕배의 발라드가 잘 팔리던 시절이죠. 제가 홍보를 도운 이승환의 '텅빈 마음'이 다운타운에서 시작해 크게 히트하는 걸 보고 '발라드를 제작해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근데 저는 당시 발라드보다 팝스런 음악을 원했어요. 이후 찾다가 신승훈 씨를 만난 거죠.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100만장이 넘게 팔리면서 업계가 뒤집어진 거예요. '생짜 신인'의 음반이 100만장 이상 팔린 거니까요. 이후 더 팝송 같은 노래를 부르는 김건모 씨가 준비하고 있었던 거고요. 원래 저는 댄스를 하고 싶었던 거였으니, 제게 '제2의 신승훈'이 없는 건 당연했어요. 신승훈 제작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는 심정이었고, 이후에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한 거죠. 김건모 씨는 제가 아끼던 가수인 박미경 씨의 학교(서울예대) 후배인데 그녀가 '스티비 원더처럼 노래한다'면서 소개해준 친구였어요. 당시에 건모 씨를 보자마자 제 뚜껑이 열렸죠. R&B, 솔, 펑키가 되니까. 한국말로 하니까 가요인 거지, 영어로 했으면 그냥 팝이었어요. (김건모 1집에 실린 곡으로 천성일이 작사·작곡한) '내가 그댈 느끼는 동안'의 코드웍은 지금도 세련됐어요. 당시 타이틀곡은 아니었지만 음반을 산 분들은 알았죠. 특히 LA에서 공부한 분들은 이 음반을 듣고 '우리 음악이 이 정도야'라는 자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라인음향이 참 세련된 음악을 많이 들려주셨어요.

"당시 저희는 '해외랑 같이 간다'가 추구하는 바였어요. '가요에 갇혀 있지 않고 팝송과 맞붙는다'였죠. '핑계' 때 그걸 이뤄냈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선배가 없는 음악', 즉 '미디 음악'을 했으니까요. 그 때 음악 선배들은 어쿠스틱을 했어요. 중요한 분기점은 90년대 초 미국에 공연하러 갔다가 들른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쇼'(CES)였어요. 당시 CF 감독이던 마이클 베이가 펩시 콜라 광고를 선보이면서 '프로툴'(미디(MIDI)·녹음·믹싱·마스터링 등을 한번에 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음악프로그램)을 시연했는데, 당시에 가격이 5000만원이었어요. 너무 대단하게 느껴져 '집 팔아서라도 산다'는 마음으로 구매를 문의했더니, 한국에 대리점이 없어 A/S가 힘들어 못 판다는 거예요. 한국에 대리점이 생기면 알려준다고 해서 연락처를 남겼고 이후 대리점이 생긴 뒤 1호로 샀죠.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라인음향이 산다고 하니까 CD에 '프로툴 마크'를 박아줄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래서 김건모 2집에 새겼죠."

-2015년 말 방송한 엠넷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주제곡 '픽 미(Pick me)'가 프로그램 안밖에서 신드롬을 일으켰었습니다. 무려 '픽미'가 56번이나 반복되는 중독성이 화제가 됐었던 EDM인데요. 이 곡을 만든 주인공이신데, 처음엔 '픽 미' 작사·작곡가가 '마이다스-티(Midas-T)'로만 알려졌습니다.

[서울=뉴시스] 김창환 회장. 2022.06.22. (사진 =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EDM에 심취해서 EDM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는 현실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제일 잘 나갈 때 꼬마 PD였던 PD가 국장(한동철 전 엠넷 PD)이 돼 아이돌 오디션을 한다고 하는 거예요. 연습생 50명을 이야기하길래 '일본 AKB48과 (멤버 숫자가) 비슷하니 아예 100명으로 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죠. 그러면 '내가 주제곡을 써주겠다'고 했죠. 그 친구는 제 시대를 산 친구니까 '진짜 써주시는 거죠?'라고 재차 확인을 한 뒤 나중에 전화하더니 '연습생 101명'으로 프로그램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대로 쓰게 된 거죠. 그런데 제 이름이 적히는 순간 '김창환 아직도 노래를 쓰냐'라는 반응이 나올 게 뻔했거든요. 제 이름만 나오면 90년대로 끌고 가거든요. 하하. 그런데 '픽미'가 터져버린 거예요. 아이돌 노래로는 이상한 음악이니까 '이게 뭐지?'라고 반응하면서도, 그 이상한 매력에 계속 듣게 된 거죠. EDM의 매력은 단순함의 반복이거든요. 멜론에서 1위를 찍기도 했죠. 제 이름을 안 써서 객관적으로 (대중이) 듣게 됐던 거 같아요."

-한국음악콘텐츠협회(KMCA)를 창설하시고 회장직을 맡고 계십니다. SM·JYP·YG·하이브 같은 국내 대형 음반 기획사와 내로라하는 유통사들이 대거 속한 협회인데요.

"일본에선 (제작사와 가수 사이에) 분쟁이 나면 업계가 해결하더라고요. 어느 가수가 제작자랑 합의를 안 하고 헤어지면 다른 회사에서 같이 일을 하지 않는 거예요. 만약 다른 회사로 옮기려면 이전 제작자의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평생 톱가수를 만나는 건 그 친구 한명이에요. 제2의 누구를 제작하기는 정말 힘들죠. 사람 인연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업계 생태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KMP(코리아 뮤직 파워 프로젝트)라고 해서 7개 회사가 소모임으로 시작을 했죠. 당시 한 걸그룹 분쟁이 벌어졌는데 저희가 '그런 식으로 하지마'라고 경고한 뒤 (가수랑 회사가) 협의를 했어요. 경쟁하지 말고 공정하고 정당하게 일을 처리하자가 기조였어요. 이후 협회가 점점 커졌고 기존에 있던 유통사들의 모임인 사단법인을 인수하면서 지금의 꼴을 갖추게 됐습니다."

-음악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나 선구자 역을 해오셨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그저 좋은 선진국 문화를 보고 와서 그걸 시스템화 하려고 하다 보니까 된 거예요. 무엇을 더 하기 보다 지금도 여전히 음악을 하고 싶어요."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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