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위한 최선

한겨레 2022. 6. 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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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손아람|작가

할머니는 나이 든 개를 떠나보냈다. 지방의 동물보호소로. 개를 위한 최선이라고 했다. ‘보호’라는 단어에 암시된 안락한 어감과 함께 할머니의 묘사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동물보호소는 이런 풍경이었다. 동물들이 갑갑한 실내 환경에서 더이상 고통받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다른 동물과 어울려 자연스러운 무리생활을 하는 곳.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처럼 정성스럽게 동물을 돌보는 곳. 동물의 천국. 동물의 낙원.

보호소 전화번호를 찾아내 개가 잘 지내는지 물었다. 안락사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보호자가 맞다면 빨리 찾아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차를 잡아타고 즉시 보호소로 달려갔다. 처음 경험한 동물보호소는 이런 곳이었다. 컨테이너처럼 쌓아놓은 철장에 갇힌 동물들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곳. 맹렬한 적의를 불태우며 서로를 향해 시끄럽게 짖어대는 곳. 방문객을 접대하는 자원봉사자의 옷깃까지 악취가 스며드는 곳. 동물 수용소. 동물 격리소. 수의사가 비좁은 철장 안에서 꺼낸 개는 바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나는 그에게 후원할 방법이 있겠냐고 물었다. 수의사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후원은 안 해도 됩니다. 키우던 개나 데리고 오지 마세요.

쓰고 보니 꼭 유년기의 추억처럼 들린다. 그때 나는 스무살이 넘었다. 동물보호소의 환경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지만, 내가 특별히 더 무지했던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 떠돌이 개 한마리를 동네 견주 모임에서 구조했다. 모두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밥동냥을 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깡마른 개를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의논 끝에 길거리의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개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친히 동물보호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철장 안에 갇힌 채로 열흘 남짓한 보호의무기간이 지나면 안락사를 당하는 곳으로. 길거리와 보호소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를 동물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 선행을 동물보호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대표가 임의로 집행한 안락사로 논란을 일으킨 뒤, 동물권 단체 케어는 해외에서도 안락사를 집행하고 있다며 오히려 사회적 논의를 해보자는 입장문을 냈다. 안락사와 동물보호의 양립불가능한 모순에 동물권 단체마저 무감각해진 이유는 ‘보호’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외 동물보호소도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지만, 그러한 동물보호소들에 대한 입장은 해외에서도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인상을 전파하는 ‘보호소’란 명칭을 ‘안락사 대기소’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락사는 유기동물의 개체수 조절이란 목적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동물관리 방식이다. 취지야 무엇이든 이 방법에 의존하는 동물보호소는 유해한 도심환경으로부터 유기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불어난 도심의 유기동물이 끼칠 미지의 피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격리수용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유기동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게 나쁜 일인가? 물론 그렇진 않다. 하지만 역할에는 적당한 이름이 붙어야 한다. 감옥을 ‘범죄자 보호소’라 부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란 쪽지와 함께 보호소 앞에 반려동물을 던져두고 사라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동물보호소가 어떤 모습일지, 가족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동물복지를 사회적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현행 동물보호법은 동물수용시설을 ‘동물보호소’로, 안락사를 ‘인도적 처리’로 명명한다. 이 법에 사용된 말랑말랑한 어휘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아마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일 터다. 인간이 동물복지를 완전히 책임질 수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동물관리 시스템이 인간 복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겸허하게 인정하자. 법의 어휘를 양심에 흉터가 남을 만큼 엄격한 단어들로 바꾸는 데서 출발하면 좋겠다. 안락사 없이는 동물관리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현실의 관점이지만, 이 시스템에 동물보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 초현실적인 망상이다. 이것이 체계적인 동물 살해라는 사실을 일깨울 만한 적당한 이름을 찾자. 우리가 어쩔 수 없어서 그것을 당장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서 그것을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피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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