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깊고 깊은 골짜기에 2개의 옥빛 폭포 [자박자박 소읍탐방]
핏대봉(881.3m), 두리봉(1,074m), 육백산(1,243m), 백병산(1,259m). 골짜기를 두르고 있는 산줄기가 높기도 하다. 삼척 도계읍은 1,000m급 고봉 아래 협곡에 자리 잡고 있다. 존재도 몰랐을 산골이 읍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불이 된 광산 개발 덕분이었다.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은 지금, 지역의 또 다른 보물이 조금씩 제 빛을 발하고 있다. 도계 깊은 골짜기에 숨겨진 이끼폭포와 미인폭포를 찾아간다.
만만치 않은 산행 끝에 옥빛 물소리
이끼폭포가 위치한 곳은 무건리, 도계 읍내에서 삼척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에서 고사리로 빠져 나와 좁은 계곡을 약 4㎞ 들어가면 마을 입구다. 4차선에서 바로 좁은 산길로 이어지니 단박에 몇 십 년은 시간을 후퇴한 듯하다.
마을 앞에 10여 대 차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이곳부터 폭포까지는 약 3㎞,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지지만 주민을 제외하면 차량 통행 금지다. 마을 주민이라야 10명 남짓하다. 6가구가 등록돼 있지만 실제 거주하는 집은 3가구에 불과하다. 그것도 한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폭포까지 이어지는 산길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주차장에서 폭포까지는 1시간 30분가량 잡는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다.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포장도로여서 순탄해 보이지만 조금만 걸어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초롱꽃과 엉겅퀴 등 길섶에 핀 예쁜 들꽃에 눈길을 주며 지그재그로 난 길을 천천히 걷는다. 인공으로 가꾼 낙엽송과 참나무 층층나무 다래나무 등 저절로 자란 나무들이 섞여 숲을 이루니 그늘은 아쉬울 게 없다. 버려진 듯한 옛집도 보인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그렇게 산등성이에 도착해 이정표를 보니 채 500m도 오지 못했다. 이곳부터는 비포장이지만 평지여서 걷기는 수월하다. 도로 폭은 제법 넓은데 한쪽은 끝 모를 낭떠러지다. 외지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는 이유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도 눈높이와 엇비슷하게 산등성이가 이어진다.
정말 사람이 살까 의심이 생길 즈음, 밀림 속 산장처럼 외딴집 한 채가 보인다. 한때는 이끼폭포에 오는 이들이 쉬어 가는 휴게소로 운영했는데, 코로나19 이후에는 그마저도 접고 자연 속에 묻힌 집이다. 입구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무건리는 본래 ‘물건네(물 건너 마을)’가 와전된 지명이라 한다. 이름대로라면 개울 건너 안쪽 마을인 셈이다. 삼척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마을이 형성됐고, 1962년에는 성황·소치·대포 등 7개 자연부락에 48가구 344명이나 살았다고 한다.
외딴집에서 조금 더 가면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시멘트 외벽에 ‘1971년 8월 3일’이라고 쓰여진 마을 우물은 등산객의 약수터가 됐다. 우물에 달린 문고리 안쪽에 플라스틱 바가지가 걸려 있다. 산에서 솟아나는 물이라 달고 시원하다. 인근에 ‘소달초등학교 무건분교’ 팻말도 보인다. 1966년 개교해 1994년 문을 닫기까지 8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적혀 있다. 풀과 나무가 무성한 가파른 산자락이라 도무지 학교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사라진 산길에 이따금씩 새소리만 청아하다.
분교 터를 지나 폭포까지는 다시 가파른 내리막이다. 야자 매트를 깔고 목재 계단을 설치해 걷는 데는 불편이 없지만, 다시 올라올 걸 생각하면 500여 개에 이르는 계단이 부담스럽다. 한 발짝씩 내려서면 멀리서 들리던 물소리가 차츰 가까워진다. 마침내 계곡에 도착하니 산행의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줄 물줄기가 숨겨놓은 보물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대로 초록 이끼가 잔뜩 덮인 바위 사이로 하얀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쏟아지고, 우유를 풀어 놓은 듯 푸르스름한 계곡물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이 물결에 부서진다. 그대로 선경이다.
왼편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바위 절벽 사이에 또 두 가닥의 물줄기가 단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이끼는 더욱 짙고, 하얀 물길은 더 길고 선명하다. 편의상 제2이끼폭포라 하는데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명칭은 용소폭포다.
전망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물줄기가 또 여러 가닥이고, 그 안에는 석회암 동굴인 용소굴이 있다. 입구가 막힌 폐쇄 동굴이지만 길이가 150m에 이르고, 안에는 호수가 있다고 한다. 긴띠노래기, 굴왕거미, 가식톡토기, 거미파리, 우수리박쥐 등 동굴에 서식하는 7종의 동물도 보고됐다. 당연히 접근 불가다. 영원한 신비로 보존해야 할 자연유산이다.
미인폭포 가는 길에 뜻밖의 선물, 통리협곡
도계 읍내를 기준으로 이끼폭포는 북쪽, 미인폭포는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지형의 높낮이로는 미인폭포가 위다. 행정구역상 삼척 땅이지만 태백 통리에서 가깝다. 통리삼거리에서 삼척 가곡면으로 이어지는 427번 지방도로로 약 1㎞만 가면 왼쪽에 폭포 입구가 보인다.
도로가 해발 700m가 넘는 산중이라 주차장에서 폭포까지는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야 한다. 바닥이 미끄럽고 돌부리가 날카로워 다소 위험했던 길을 최근 야자 매트와 목재 데크로 말끔하게 정비했다. 예전에는 여래사라는 작은 사찰 앞마당을 통과해야 했지만, 새로 낸 탐방로는 계곡으로 붙어 우회한다. 덕분에 최고 높이 270m에 이르는 협곡의 위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목재 탐방로 입구에 ‘한국의 그랜드캐니언, 심포협곡’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세계적 대협곡에 비길 정도인가 싶은데, 눈앞에 나타나는 거대한 암벽은 국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절경이다. 두꺼운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 놓은 것 같은 웅장한 바위덩어리에 입이 딱 벌어진다.
삼척 심포리여서 ‘심포협곡’이라 써 놓았지만, 보통은 통리협곡이라 부른다. 고생대 퇴적층에 중생대의 화산폭발과 차별침식, 신생대의 단층과 습곡으로 만들어졌다니 수억 년 지질 역사가 쌓인 계곡이다. 협곡 전체가 붉은 기운을 띠는데, 바다나 호수에서 융기한 퇴적암이 공기 중에 노출돼 산화된 때문이라고 한다. 폭포 보러 갔다가 뜻밖의 선물을 만난 셈이다.
거친 바위만 뒹굴던 미인폭포 아래에도 말끔한 전망대가 설치됐다. 왜 ‘미인폭포’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폭포 윗마을에 미인이 많았다는 설도 있고, 사별한 남편을 따라 몸을 던졌다는 ‘여인 잔혹사’도 거론되지만 3류 소설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단지 폭포의 생김새로 미인을 상상해 볼 수는 있겠다. 꼭대기에서 한줄기로 쏟아지던 물줄기는 중간쯤에서 치마폭처럼 펼쳐진 붉은 암반을 타고 흘러내린다. 우락부락한 암벽 사이에서 30m의 늘씬한 몸매가 도드라진다.
전망대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설치돼 있다.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석회질 성분이 많아 우유를 풀어놓은 듯 밝은 하늘색을 띤다. 덕분에 깊은 산중이라 찾는 이가 별로 없던 이곳에 SNS용 ‘감성 사진’을 찍으려는 연인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단, 비가 내린 후 2~3일은 우윳빛이 사라진다고 하니 참고하는 게 좋겠다.
폭포에서 돌아 나오는 길, 협곡 끝자락의 웅장한 바위 뒤로 ‘하이원추추파크’가 보인다. 영동선 폐선로를 이용한 기차테마파크다. 통리역~도계역 구간 표고(435m)를 극복하기 위해 ‘갈지(之)’ 자로 이동하는 스위치백트레인, 케이블로 객차를 끌어올리거나 내리는 인클라인트레인은 이곳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명물이다. 인클라인트레인은 600마력 대형 권양기로 화차를 달아 내리는 방식이다. 통리역에서 1,080m 내려진 40톤 무게의 화차는 심포리역에서 다시 기관차에 연결해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스위치백 선로로 이동했다. 심포리와 통리에서 내린 승객은 인클라인 옆 좁은 인도를 따라 걸어서 오르내리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최고 15도의 급경사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구간 선로는 2012년 땅속에서 크게 똬리를 틀며 돌아가는 솔안터널이 개통하면서 관광 시설로 남게 됐다.
지역에 철도가 가설된 것은 여객이 아니라 석탄을 원활하게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도계읍 흥전리(도계로 41) 폐선로 주변은 ‘흥전삭도마을역’으로 꾸며져 있다. 석탄을 운송하던 삭도 모형이 설치돼 있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일렬로 길게 늘어선 광부 주택(사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열차가 다니지 않는 선로 주변에 뒤늦게 장미꽃이 곱게 피어 있다.
삼척=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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