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통도사가 현충시설로 지정된 까닭은?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6.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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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통도사에서 열린 호국영령 위령재. 높이 12미터짜리 괘불도 오랜만에 걸렸다. /통도사 제공

◇지난 18일 현충시설 지정 기념 위령재

지난 6월 18일 오전 경남 양산 통도사 대웅전 앞마당에선 큰 행사가 열렸습니다. ‘현충시설 지정 기념 호국영령 위령재’였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조계종 종정이자 통도사 방장인 성파 스님을 비롯해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주호영 윤영석(이상 국민의힘) 민홍철(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 신범철 국방부 차관을 비롯해 스님과 신자 등 1000여명이 대거 참석했지요. 이 자리에는 보물로 지정된 길이 12미터짜리 통도사 괘불(부처님을 그린 걸개그림)도 오랜만에 선보였습니다. 이날 행사는 통도사가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열린 호국 위령 행사였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사찰 통도사가 국가 현충시설이라니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엔 ‘현충시설이란 조국의 독립, 국가의 수호 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한 시설 등으로서 독립운동시설과 국가수호시설로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통도사는 국가수호시설에 해당합니다.

통도사 용화전 미륵불. 2019년 미륵불을 보수하기 위해 복장유물을 확인하던 중 6.25 당시 통도사가 국군병원으로 이용된 내력을 적은 연기문이 발견됐다. /통도사 제공

◇6.25때 통도사 국군병원 분원 설치...작년 11월 현충시설로 지정돼

이날 행사는 통도사가 6·25 전쟁 당시 국군 병원이었던 사실이 최근 밝혀진 데서 비롯됐습니다. 6·25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제31 육군병원의 분원(分院)이 통도사에 설치됐던 것이죠. 통도사가 육군병원 역할을 했다는 것은 6·25 당시에 통도사에 살았던 스님들이나 주변분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온 이야기였답니다. 그러나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 기억에선 희미해졌지요. 국방부 등엔 공식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고요.

국가보훈처가 2021년 11월 1일자로 발행한 '현충시설 지정서'. /통도사 제공

◇“6.25사변 후 상이병 3000명 入寺” 불상에서 나온 기록이 실마리

그대로 묻혀버릴뻔 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어쩌면 우연이었습니다. 2019년 용화전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불상의 뱃속)에서 나온 연기문(緣起文)이 실마리였습니다. 복장 유물은 일종의 ‘타임머신’입니다. 불상의 뱃속에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를 적은 글과 귀한 물건을 넣은 후 웬만해선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2019년 통도사 용화전 미륵불 복장 유물을 조사하게 된 것도 흙으로 빚은 불상을 보수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52년 미륵불상을 새로 만들어 모시게 된 내력을 적은 연기문이 나온 것입니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구하 스님이 적은 이 기록엔 “경인(1950년) 6·25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명이 입사(入寺)하야 임진(1952년) 년 4월 12일에 퇴거(退去) 즉(則) 사찰 각 법당, 각 요사, 각 암(庵) 전부 퇴패(頹敗)는 불가형언(不可形言) 중 용화전 미륵불은 영위파손(永爲破損)되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연인원 3000명의 부상병이 통도사에서 치료받던 중 각 전각과 불상의 훼손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는 뜻이지요. 그중 특히 용화전 미륵불의 파손이 심해 1952년 4월 부상병들이 모두 떠난 5개월 후인 1952년 9월 미륵불을 새로 조성해 봉안하게 됐다는 사연입니다. 연기문의 내용은 미륵불을 새로 만들게 된 사연을 적은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통도사가 6·25 와중에 부상병의 치료를 위한 병원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통도사 전각에서 발견된 낙서들. 국군병원 통도사 분원에 입원했던 부상병들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 제공

◇“가노라 통도사야, 잘 있거라 전우야” 낙서도 발견

이 실마리가 나오자 그동안 통도사에 산재해있던 퍼즐 조각들이 ‘국군병원’이라는 전체 그림에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통도사 여러 전각에서는 낙서가 많이 발견됐습니다. 일반인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대광명전 벽에서도 ‘停戰(정전)이 웬말이냐’ ‘가노라 通度寺(통도사)야, 잘 있거라 戰友(전우)들아’로 시작하는 시(詩)도 발견됐습니다. 또 ‘檀紀(단기) 4284년(1951년) 4월 29일 退院(퇴원) 傷者(상자) 出發(출발)’ 등의 구절도 있었고, 탱크와 트럭을 그린 그림 낙서도 발견됐지요. ‘4284′이란 숫자를 적은 낙서가 많았던 것도 전쟁 중 쓰여진 것이란 점을 보여줍니다.

이런 낙서들은 그동안 꿰지 않은 구슬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용화전 미륵불 복장에서 연기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국군병원 통도사 분원’이란 실로 꿰어보니 소중한 사료가 된 것입니다. ‘정전이 웬말이냐’는 낙서는 당시 정전에 반대하던 민심을 대변한 것이며, 퇴원이란 단어는 통도사가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암자마다 부상병” 증언 등 퍼즐 맞추듯 모아

통도사는 증언 수집에도 나섰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에 따르면 전쟁 당시 통도사 스님들은 사찰을 거의 통째로 국군병원으로 사용하도록 내어줬던 것 같습니다. 18일 위령 행사에서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은 “전쟁 중에는 명부전이 부상병을 위한 교회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통도사 큰절과 여러 암자는 모두 부상병 치료소와 사무실로 쓰인 것이지요. 전쟁 중에 무질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용화전에는 환자들이 벽에도 낙서를 해놓고 엉망이었답니다. 대광명전에는 부처님(불상)을 삐딱하게 돌려놓고 불단에 올라가 누워있는 부상병도 있었다지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통도사 국군병원 분원에 양말 2600켤레를 위문품으로 보냈다는 신문기사도 발견됐습니다.

통도사는 이런 자료를 모두 모아 2020년 1월 국방부와 육군본부, 국군의무사령부 등에 통도사 국군병원 분원의 존재를 밝혀달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또 2020년 3월엔 당시 부상병과 유족들의 증언을 모아 자료집도 발간했지요. 이에 국방부는 2021년 군사편찬연구소를 통해 통도사가 제31 육군병원 분원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11월 1일자로 통도사를 현충시설물로 지정했습니다.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이 18일 위령재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통도사 제공

◇주지 현문 스님 “노스님들께 들었던 옛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

지난 18일 행사는 통도사가 공식 현충시설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개최한 첫 행사였습니다. 6·25전쟁 중 통도사 병원에서 사망한 병사를 비롯해 산화한 모든 영령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였지요.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은 “어릴 적 출가했을 때 구하 스님 등 노스님들로부터 통도사에 관한 옛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옛 이야기 중 하나인 통도사 병원이 드디어 역사로 인정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문 스님은 또 “현충시설로 지정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통도사를 찾는 분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 통도사와 스님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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