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 부른 자유주의 빈곤.."압축적 근대화의 결과"

김민호 2022. 6.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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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계의 화두인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담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자유주의 부재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뿐만 아니라 민주정부를 자처한 민주화 세력 역시 민주적 질서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위기에 빠뜨린 것이 자유주의의 빈곤에서 비롯됐다는 진단에서다.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봉쇄하는 '문자 폭탄' 행태나 정치적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진영 대립 등이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경시했던 후과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특정 세대 용퇴나 책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우리가 겪은 근대화의 특징에서 비롯된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다름 아닌 한국의 근대화 과정 연구에 천착해온 서울대 장경섭 사회학과 교수의 '압축적 근대성' 이론이다. 지난 20여 년간 진행한 연구를 집약한 학술서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The Logic of Compressed Modernity)’를 지난 4월 영국에서 출판한 장 교수를 최근 만났다.

한국 근대화 과정에 대한 20여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저서를 해외에서 출간한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압축적 근대성'을 설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서구 제도가 순간이동…동도서기가 아니라 무도서기"

장 교수가 고안한 개념인 ‘압축적 근대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대만처럼 급속하게 발전한 국가들에서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의 저서가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설립한 출판사 '폴리티 프레스'를 통해 출간된 후 중국어와 프랑스어, 아랍어 번역본과 미국 출간을 앞두고 있는 배경이다. 이에 따르면 탈식민 국가들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과정에서 시공간적 압축이 나타난다. 선진국이 2, 3세기 동안 달성한 산업화를 한국이 반세기 만에 이룬 것은 ‘시간적 단축’이다. 한국이 건국과 동시에 서구의 문명적·기술적 요소를 들여온 것은 ‘공간적 압축’이다.

문제는 오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서구의 제도가 1948년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그대로 갑작스럽게 이식됐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서구 민주주의가 순간 이동해서 한국에 탁 들어선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출범 당시 제도적으로는 세계에서 맨 앞줄에 선 근대국가로 선포됐다"며 "강제성이 있는 제도가 생겨났지만 제도를 뒷받침하는 물질성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가가 제도를 도입하고 결정까지 주도하는 상황에서 시민이 움직일 공간은 좁았다. 자유주의가 자랄 수 있는 여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장 교수는 “한국 근대화의 최대 모순은 자유주의 제도가 시민사회라는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라면서 “서구 자유주의 제도를 도입했음에도 시민사회의 자유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민들이 국가의 통제를 받고 권위주의가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역공학적으로 분해한 뒤 베껴서 한국에 도입하는 방식은 효율적이었지만 지식과 제도가 한국의 역사적 정신이나 문화적 맥락과 맞는지 확인하는 단계가 없었다"며 "한국의 근대화는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무(無)도서기'"라고 꼬집었다.

앤서니 기든스가 설립한 출판사인 폴리티 프레스가 지난 4월 영국에서 출간한 장경섭 교수의 저서 '압축적 근대성의 논리'. 인터넷 캡처

"모든 분야에서 정상 부패 나타나"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이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자)’에 치우친 것도 압축적 근대성과 연관이 있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자유주의 등이 부재한 상황에서 다른 것들이 제도의 빈틈을 채웠는데 학벌주의가 대표적 요소라는 주장이다. 그는 “대학이 서구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고 그 제도를 운영하는 기능인을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대학이 국가 지향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은 시민 중심의 자유주의 체제와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압축적 근대화의 결과로 자유주의 부재뿐만 아니라 부패도 구조화됐다는 게 장 교수의 분석이다. 제도가 원리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니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편법과 탈법이 만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패가 특정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이란 의미에서 그는 '정상 부패'라고 불렀다.


"적폐청산으로는 한계…지식인들 역할 해야"

적폐 청산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장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정상 부패에 동참하지 않으면 경쟁도 어렵고 국가에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런 이중성 때문에 한국에서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게 없다. 모든 섹터(분야)가 잠재적 소추 대상이 된다”면서 “적폐청산을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선택적 처벌이 된다. ‘운이 없어서 나만 걸렸다’는 인식이 보편화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물론 잘못이 드러난 인물들은 처벌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이중적 질서, 정상 부패를 포함한 질서 자체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면서 “지식인들의 직무유기도 현재 상황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들은 정치로 풀 수 없는 것도 정치화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회든 범사회적 문명 운동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근본적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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