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수거책은 되지 말자 [정명원 검사의 소소한 생각]
편집자주
17년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청년은 그저 알바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에서 '고액 알바, 자격 요건 없음, 시간 조절 가능' 구인글을 보고 연락하자, 채권추심회사의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연락해 왔다. 고객을 만나 돈을 받아서 무통장입금만 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했고, 수당과 경비를 넉넉히 주겠다고 했다. 우선은 임시직이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겠다고 하니, 이런 꿀알바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었다. 김 실장이 요구하는 대로 신분증, 주민등록등본, 계좌 사본 등을 사진 찍어 전송하자 곧 채용이 되었다는 안내 문자가 왔다. 업무 연락에 필요한 텔레그램을 깔고 내일 아침 8시까지 깔끔한 옷을 입고 주거지 인근 카페에서 대기하란다.
'출근하면 얼굴과 옷차림이 보이도록 사진 찍어 전송하는 방법으로 출근인증을 해 주세요. 잘해봅시다. 파이팅!'
간단하고도 신속한 채용절차였다. 청년은 채권추심회사라는 ○○신용회사에 실제로 가보지 않았다. 그를 채용해 준 김 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창에 ○○신용정보라고 치면 서울 역삼동 어딘가의 주소가 검색된다. 김 실장의 대화창에는 말끔한 사원증 사진이 걸려 있다. 인터넷의 세계에 김 실장과 ○○신용정보는 완벽하게 존재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청년은 정규직이 되어 역삼동의 사무실에 출근할 자신의 모습을 멀리 그려 보았다. 그리고 청년은 지금 보이스피싱 사기의 공범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가 한 일은 매우 간단하다. 김 실장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장소에 가서 고객을 만나 '○○저축은행 김○○ 대리로 온 최○○입니다'라고 말하고 현금을 전달받는다. 근처 ATM기에 가서 받은 돈을 100만 원 단위로 나누어 무통장 입금하기만 하면 일이 끝난다. 무통장 입금에 사용할 입금자 명의와 계좌정보는 김 실장이 텔레그램으로 전송해 준다. 수당은 14만 원, 택시비와 식사비도 별도로 챙겨준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보이스피싱 수거책, 사기의 공범이라고 한다.
당신은 ○○저축은행에서 온 최○○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 고액의 현금을 수송하는 일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당신에게 맡길 회사가 있겠냐는 질문, 그냥 돈을 무통장입금하면 되는 일이라면 고객이 직접 하면 되지 당신을 고용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질문, 채권을 추심하는 회사가 고객 명의가 아닌 다른 사람 명의와 계좌로 돈을 100만 원 단위로 나누어 송금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냐는 질문 앞에 청년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처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알바를 했을 뿐이라니까요.'
그의 진술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가장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출근 인증샷을 찍어 보내던 아침, '보이스피싱 범죄의 수거책'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결심 같은 것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행위가 없었다면 보이스피싱 범죄는 완성되지 않았다. 서둘러 일자리를 구해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간절함, 그저 시키는 일을 하고 돈만 받으면 된다는 무심함 같은 것들이 눈을 가려, 마땅히 의심해보아야 했던 지점들, 마땅히 되짚어 보았어야 하는 사정들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수거책은 탄생한다. 약간의 방심과 무책임만으로도 평범한 아르바이트는 누군가의 피땀 어린 재산을 빼앗는 범죄가 될 수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이용당했다는 측면에서 그에게 돈을 건넨 피해자와 마찬가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는 자각은 어쩌면 돈을 잃은 경우보다 더 무겁고 아프다. 그러므로 청년들이여, 어쨌든 수거책은 되지 말자. 어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더라도, 거액 현금을 받아 타인 명의로 송금하면서 합법적인 일은 없다.
정명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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