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업계의 '셰르파' 대필작가를 아시나요

이진한 2022. 6. 2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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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균 한국대필작가협회장
국내 활동 대필작가 약 1만명
이 중 500여 명이 협회 소속
기자·의사·변호사 등 출신 다양
과거엔 자서전·회고록 중심
가상화폐·부동산·유튜버 등
전문 분야 의뢰인들 증가 추세
"학술논문 대필은 범죄"
1976년 발표된 소설가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는 대필작가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작품은 남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온 '지욱'이 코미디언의 자서전을 쓰다가 그만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대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나 소설의 주제와 별개로 약 50년 전에도 대필작가가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재균 한국대필작가협회장(사진)은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필작가 수는 1만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중 500여 명이 협회에 가입해 공식적으로 대필작가로 활동 중"이라며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 절반 이상은 대필작가 손을 거쳤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이어 "본업이 글쓰기인 기자를 비롯해 의사나 변호사는 물론 등단한 시인 등 기성작가들이 대필작가로서 협회에 가입해 있다"고 덧붙였다.

임 회장은 2008년부터 대필 업무를 시작한 15년 차 대필작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일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앙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여의도의 한 컨설팅 업체에서 일했던 그는 2007년 세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회사가 망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남은 거라고는 사실상 노트북 컴퓨터가 전부였던 상황에서 그는 먹고살기 위해 경기도 성남의 한 시립도서관에서 대필 업무를 시작했다.

대필 업무는 단순히 글만 대신 써주는 일로 요약할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 대필작가가 글쓰기의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지만 서적의 핵심 콘텐츠는 온전히 의뢰인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필작가가 의뢰인과의 교감에 정성을 다하는 까닭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수개월을 함께 지내며 잠자리까지 공유한다고 한다. 그래서 선거자금을 목적으로 촉박하게 출판기념회를 열고 대필을 문의하는 정치인들의 의뢰는 내용과 무관하게 난도가 높은 일인 경우가 많다.

출판 시장에서 대필작가의 역할은 필수불가결한 수준으로 커지고 있다. 과거에도 수요가 있던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물론 자기계발서와 전문서적 분야가 새로운 시장이 되면서다. 일례로 최근 자산 관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상화폐나 부동산 분야 종사자 및 유튜버 등이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대필해달라는 의뢰가 늘었다고 한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은 있지만 글 쓰는 재주는 없는 사람들이 출판의 '셰르파'로서 대필작가들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업무 계약도 출판사에서 먼저 작가들에게 일감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부 출판사에서는 아예 전속 대필작가를 고용할 정도다.

임 회장은 범죄자들의 의뢰나 학술논문 대필은 수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부터 신춘문예 등단을 목적으로 작품을 써달라거나 졸업논문을 대필해달라는 식의 문의가 있지만 이는 대필이 아닌 범죄다. 개인적으로는 수감생활 중인 범죄자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 시나리오나 자전소설로 써달라는 내용의 의뢰도 수차례 받았다"면서 "처음 의뢰는 수락해 일정 단계까지 진행했지만 결국 사실을 거짓으로 꾸미는 과정에 회의감이 들어 그만뒀다. 그때 의뢰인이 가족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 이런 종류의 의뢰는 처음부터 맡지 않기로 했다"고 부연했다.

임 회장은 대필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2015년 한국대필작가협회를 만들었다. 2011년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단체를 결성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업계의 고질적 문제인 원고료 미지급을 비롯해 여성 대필작가에게 흔하게 가해지는 성희롱 등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표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협회는 현재 회원들에게 별도 가입비를 받지 않고 일감을 발굴해 필요한 작가들에게 연결하는 등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대필은 공동 저작의 한 분야"라며 "책에 대필자를 표기하는 등 인식 개선 활동도 벌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진한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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