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진실 마주한 가족의 형벌의 시간..연극 '파묻힌 아이'[리뷰]
어둠 속, 쏟아지는 빗소리로 공연은 시작을 알린다.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위에 드러난 것은 낡은 집의 형체. 창밖으론 옥수수가 빼곡하게 자라 있다. 곳곳이 부서져 위태로워 보이는 이 어둡고 음울한 공간에 한 남자가 소파에 누워 연신 기침을 해댄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면서도 숨겨둔 위스키를 홀짝이는 남자의 이름은 닷지. 그의 아내 핼리는 약 좀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장남 틸든은 비를 쫄딱 맞은 행색으로 옥수숫대를 한아름 안고 집에 들어온다.
이 가족이 나누는 대화는 어딘가 섬뜩하고 괴이하다. 틸든은 뒷마당에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랐다고 말하지만, 그의 부모는 뒷마당에선 35년 전부터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며 옥수수를 훔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옥수수를 다듬던 틸든은 집 여기저기에 옥수수 줄기를 흩뿌려 놓는다. 둘째 아들이 곧 올 거라는 핼리의 말에 “내 피붙이는 저 뒷마당에 묻혀 있어”라고 말하는 아버지 닷지의 몸 위에도.
연극 <파묻힌 아이>(Buried Child)는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낡은 집처럼 위태로운 한 가족의 이야기다. 연극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이 가족의 대화는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어긋나거나 비틀려 있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어두운 무대엔 내내 무거운 긴장감이 흐른다.
<파묻힌 아이>는 2017년 타계한 미국의 극작가 샘 셰퍼드의 ‘가족 3부작’ 중 두 번째 희곡으로 197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파괴한 전개, 충격적인 소재로 와해되는 미국 가정의 도덕적 타락을 그리며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 문제작이다. 경기도극단이 지난해 6월 경기아트센터에서 초연했고 이번엔 서울 대학로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야기는 참담하고 잔혹하다. 아들과 어머니가 충동적으로 관계를 해 아이가 태어났다. 집안의 가장 닷지는 아이를 죽여 뒷마당에 매장했고, 그날 이후 작물로 무성했던 이 집 뒷마당에는 그 어떤 것을 심어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이곳에 기형적인 남근의 상징과 같은 옥수수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집안에 손자라고 주장하는 빈스와 그의 연인 셸리가 찾아온다. 집을 떠난 지 6년이 되었다는 빈스를 어떤 이유에선지 가족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이들의 방문으로 뒷마당에 파묻혀 있던 가족의 비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태숙 연출(경기도극단 예술감독)은 신화 속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닮았으나 그보다 더 잔인한 한 가족의 죄와 형벌의 시간을 강렬하게 무대 위에 빚어냈다. 초연에서 사회적 이슈를 담는 데 방점을 뒀다면, 이번 재연 무대에선 신화적 해석을 보강하고 제의적인 면을 확대해 인간의 원형적인 두려움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종착지엔 그 어떤 용서도, 구원도 없다. 연극은 패륜과 살인의 기억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자들,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다. 극의 말미, 틸든은 파묻혔던 아이를 안고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지난해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이태섭 디자이너의 무대가 극의 음산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실제 옥수수 작물을 줄기째 가져와 집을 둘러싼 옥수수밭을 표현했고, 대형 물탱크를 활용해 쏟아지는 빗줄기를 실감나게 구현했다. 손병호(닷지), 성여진(핼리), 윤재웅(틸든) 등 배우들의 연기도 강렬하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오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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