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레드베터가 받은 쪽지
[한겨레 프리즘]
[젠더 프리즘] 이정연 | 젠더팀장
구글이 여성 직원 1만5500명에게 임금 성차별에 따른 배상금 1억1800만달러(약 1519억원)를 지급하기로 한 소식이 지난 12일(현지시각) 여러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2017년 구글에서 일하던 여성 3명이 구글에서 임금 차별, 승진기회 제한 등을 겪었다며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방법원에 소송을 냈다. 이 사안에 관해 집단소송이 가능해지자 원고는 3명에서 1만5500명으로 늘었다. 구글은 지난해에도 성별과 인종에 따른 차별적 임금 지급과 관련해 5500명에게 손해배상금 380만달러를 지급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랐다. 릴리 레드베터. 1979년부터 타이어를 만드는 대기업 ‘굿이어’의 공장 관리직으로 일했던 그는 1998년 어느 날 쪽지 한장을 받아 든다. 자신과 다른 남성 관리자 3명의 이름과 급여가 적혀 있었다. 자신은 다른 관리자보다 20~40% 적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는 같은 해 11월 회사를 상대로 20여년간 임금 차별로 받지 못한 22만달러를 반환하라며 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2007년 5월 굿이어 쪽 손을 들어줬다. 임금이 결정됐을 때에 소송을 제기했어야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다. 다수의견의 반대에 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이런 소수의견을 남겼다. “동료 직원들의 임금 수준에 관한 정보는 일반적으로 보안 사항이며,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임금 차별은 해고 등 유해 행위와 구분해야 한다. 유해 행위는 명백하여 바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임금 차별은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레드베터는 패소했지만, 싸움의 성취는 남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09년 1월20일 취임한 뒤 처음으로 서명한 법안이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이다. 2007년 릴리 레드베터는 덜 받은 임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2022년 1만5500명의 구글 직원들은 배상금을 받게 됐다.
한국에서도 더디지만, 변화는 시작됐다. 지난달 19일부터 임금을 포함한 고용상 성차별과 관련해 노동자가 ‘시정신청’을 하면 노동위원회가 직접 조사하고, 사업주에게 시정·배상 명령까지 내릴 수 있도록 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일부 개정안이 시행됐다. ‘사업주의 차별적 처우 등에 명백한 고의가 인정되거나 차별적 처우 등이 반복되는 경우’에는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을 하도록 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했다. 차별의 입증 책임도 사업주에게 돌렸다.
그러나 개정안 시행이 임금 성차별을 개선할 획기적인 계기가 될지는 불투명하다. 차별 피해를 본 노동자 당사자의 ‘시정신청’이 있어야만 기업의 차별 행위가 있는지를 조사하게 된다. 내 앞에 릴리 레드베터에게 전해진 ‘한장의 쪽지’가 없다면, 내가 임금 차별의 당사자인 줄 모른다면 시정을 요구하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나온 ‘고용 성차별 시정제도 개선방안 연구’(한국여성정책연구원)를 보면, 국외 사례로 미국 고용평등기회위원회의 ‘80% 법칙’이 언급돼 있다. 동일 노동을 하는 남성 집단의 임금을 100이라고 했을 때 여성 집단의 임금이 80을 밑도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확인된다면, 고용평등기회위원회가 기업에 차별 시정을 권고한다.
이런 제도의 도입을 위해 한국 사회에서 우선돼야 할 건 성별 임금격차의 현실을 파악하는 일이다. 새 정부는 기업의 채용단계 지원자·합격자, 근로자와 승진자 등의 성비를 공개하는 ‘성별근로공시제’를 시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공시에 직급별·직종별 ‘임금’은 빠진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의무 공시가 아닌 500인 이상 기업부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을 받은 것일까? 힘들게 일궈온 변화가 뒷걸음질 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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