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코인 붕괴의 전주곡 '플라이 미 투 더 문'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정윤섭 특파원 = 1920년대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 피셔는 주식시장 역사에서 두고두고 인용되는 말을 남겼다.
명언이어서가 아니라 완전히 빗나간 예측을 했기 때문이다.
피셔는 1929년 10월 14일 미국구매관리자협회 월례 모임에서 "주가는 영원히 높은 고원(高原)처럼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당시 증시 거품론이 제기됐지만, 주가 상승이 지속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편 것이다. 폭락을 걱정했던 투자자들은 예일대 석학의 이 한마디에 안도했다.
하지만, 열흘 뒤인 10월 24일 미국 증시는 붕괴했다.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 '검은 목요일'이었다.
이후 3년 동안 주식시장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었고 '영원한 고원'을 주장한 피셔의 명성도 추락했다.
그의 예측 실패 이후 90여 년이 흐른 미국에서는 공교롭게도 가상화폐 버전의 고원론 찬가가 울려 퍼졌다.
지난 2월 미국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 중계방송에는 흥미로운 광고가 붙었다.
감미로운 멜로디의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 배경 음악으로 깔렸고 많은 사람이 즐거운 표정으로 빌딩 숲을 날아다니는 장면이 등장했다.
가상화폐 거래소 이토로(eToro) 광고였다.
이 광고는 하늘을 날던 한 여성이 거리의 남성에게 '달에 가자'(To The Moon)는 말을 건넨 뒤 그의 손을 잡고 비상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투 더 문'은 가상화폐 시장에서 가격 급등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달까지 치솟을 정도로 가격이 오르기를 바라는 투자자들의 욕망이 투영된 문구다.
이 광고는 작년 11월 역사상 최고점을 찍은 비트코인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비트코인은 당시 개당 6만9천 달러에 근접했고 10만 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금을 대신하는 투자 자산으로 주목받으며 비트코인에 기관 자금이 몰렸고, 비트코인 관련 상장지수펀드(ETF) 거래가 이뤄지며 투자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키웠다.
그러나 이토로의 광고 4개월 뒤 가상화폐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역설적으로 코인 붕괴의 전주곡이 돼버렸고, '가상화폐 겨울'(crypto winter)이 도래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비트코인은 한때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디지털 금으로 불렸지만, 올해 들어 급격한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이 자본시장을 짓누르자 맥없이 주저앉았다.
미국 증시 약세는 가상화폐 시장에 그대로 반영됐고, 원래 변동성이 컸던 코인은 더 크게 출렁였다.
지난달에는 대형 악재가 터졌다. 시가총액 10위권 내에 들었던 한국산 코인 테라와 루나가 '죽음의 소용돌이' 현상으로 휴짓조각이 됐다.
두 코인의 폭락 사태에 특이한 알고리즘 방식으로 포장한 다단계 금융사기였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가상화폐 생태계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달에는 제2의 테라로 불리는 셀시어스 인출 중단 사태가 더해졌다.
가상화폐 금융기관 셀시어스는 코인을 예치하면 18%대 이자를 지급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으나 최근 코인 폭락 사태 속에서 인출 중단을 선언했다.
시장에 팽배한 두려움은 가상화폐 업체의 연쇄 파산설도 불러왔다.
강세장 시절 빚을 내 투자한 업체들이 코인 가치 하락에 돈을 못 갚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 노보그래츠 갤럭시디지털 최고경영자(CEO)는 "가상화폐 헤지펀드 3분의 2가 파산할 것"이라며 혹한이 더 깊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가상화폐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선 냉철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가상화폐 비중을 5% 이내로 가져가고 손실을 감내할 만큼만 투자하라는 것이다. '투 더 문' 찬가와 같은 일확천금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인 셈이다.
CNBC 방송은 전문가들을 인용해 가상화폐를 태동시킨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과 발전 가능성을 믿는 투자자라면 장기적 안목의 분산 투자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jamin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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