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클릭하기] 다시 팬덤을 구출하기
[미디어오늘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김현정과 원용진이 공저한 <팬덤 진화 그리고 그 정치성>(2002)은 학계가 팬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출발점이 된 기념비적 논문이다. 10대 청소년의 병리적 현상으로 팬덤을 바라보는 규범적 관점, 문화산업의 수익 창출 수단으로 평가 절하하는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부터 탈피해 이들은 팬덤이 대중문화를 진보적으로 개혁하는 정치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분석 대상인 서태지 팬클럽의 문화 실천은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음악 다양성을 훼손하는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를 이끌었고 공연윤리위원회 음반 사전심의 규제를 철폐했으며, 지상파 연예 프로그램의 황색 저널리즘과 적대적 긴장 관계를 맺었다. 모든 팬덤이 서태지 팬덤처럼 될 필요는 없지만 어떤 팬덤은 팬 공동체를 넘어 “시민적 결사에 기초한 사회운동의 접합 가능성, 제 3부문의 사회적 주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이들 연구자들에게 팬덤은 그들만의 자족적 정서 공동체에서 벗어나 민의와 공감을 결집하고, 타인을 설득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민주주의의 주요한 자원이었다.
해당 작업을 필두로 지난 20년간 한국 언론학은 다양한 팬덤 연구를 축적했다. 특히 문화연구자들이 중심에 자리했는데, 그들이 공유한 암묵적 전제는 김현정과 원용진의 작업이 그러했듯, 팬덤의 폐쇄적 경계 허물기와 사회화이다. 이기형과 김영찬의 <'네 멋대로 해라' 폐인들의 문화적 실천에 관한 현장 보고서>(2003)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종영 이후에도 드라마 촬영 장소를 순례하고 DVD 등을 통해 반복 시청하는 열혈 시청자들의 문화 실천을 성실히 채집하며 사회 비주류의 행복 바라기에 대한 대중 염원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김수아의 <남성 아이돌 스타의 남성성 재현과 성인 여성 팬덤의 소비 방식 구성>(2011)은 남성성을 전유해 성애화하는 여성 팬들의 탈가부장적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문화산업이 주조한 가부장적 남성성이 여성에 의해 재추인되는 불편한 모순을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이 외에도 많은 논문들이 팬덤으로 가시화된 수용자의 사회적 열망을 이론적, 학술적으로 묶어 그 잠재성을 평가하며, 자칫 팬덤이 빠질 수 있는 편협한 자족성과 상업주의로부터 팬덤을 구출하기 위해 분투했다. 팬덤은 그 자체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지 않았다. 대중의 응집된 에너지를 둘러싼 문화산업과 시민사회의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중요한 것은 공동의 정서를 매개로 모인 이들이 그 이후 어떠한 행보를 보여주는가이다. 그에 따라 팬덤은 스타와 문화산업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가 부화뇌동하는 병리적 모습으로, 혹은 사회의 원심력으로 뻗어나가 다양한 진보적 의제와 결합하는 민주주의 실험으로 다르게 진화한다.
물론 현실 속에서 진보적 팬덤의 발생 빈도수는 극도로 희소하다. 문화산업은 보다 교묘하고 정교하게 팬덤을 자기 통제 하에 두려했다. 국민 프로듀서로 동참해 달라 호소하며 적극적으로 팬덤을 착취해 프로그램의 상업성을 제고한 <프로듀스 101>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더욱이 팬들조차 자신의 자족적 공동체 바깥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팬덤이 갖는 진보적 가능성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모든 것이 각자도생으로 귀결되고 신자유주의의 “사회 같은 것은 없다. 있는 것은 개인과 가족뿐이다”라는 슬로건이 일반화된 현 세태 속에서 팬덤은 찰나적이나마 사람을 잇는 연대의 경험, 그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상상을 꿈꾸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듀스 101>의 상업적 성공 요인도 팬덤이었지만 이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을 밝혀내 문화산업의 불공정성을 폭로하고 수년 간 거듭된 극한 경쟁의 무대를 무너뜨린 것 역시 팬덤이었다.
최근 정치계에서 소위 '팬덤 정치'에 대한 우려가 크다. 유력 정치인에 열광하는 정치 커뮤니티 조직화, 경쟁 정치세력에 대한 배타적이며 위협적인 세 과시,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도구로서의 시민 동원이 유행처럼 번져나간다. 상황은 흡사 팬덤을 병리적으로 진단하고 문화산업의 수족으로 파악했던 20년 전과 닮았다. 그 때 문화연구자들은 팬덤을 비난하기보다는 팬덤의 긍정성을 벼리는데 집중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팬덤 정치'는 어떨까?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릴 수 없다. 시민의 정치 참여 열망을 포괄하면서도 특정 정파의 사유화 기제로부터 팬덤을 구출하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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