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개 동그라미..합쳐지지도 떨어지지 않은 채 '위안' 퍼뜨려

한겨레 2022. 6. 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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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갔다
'치유의 시간, 부처를 만나다' 특별전
보살상들 인자한 미소에 '개운'
희랑대사 조각은 성찰 느끼게
연꽃 속 이상세계 '화장찰해도'
독립-고립 오가는 우리에게 위안
<화장찰해도>, 조선 1896년께, 봉화·법현·긍엽 3명 제작, 경북 예천군 용문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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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비가 쏟아지는 부산박물관 정원에 들어서면 격조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지금 걷는 이곳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고 싶은 그들은 아마 풀과 나무의 빛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전통문양인 뇌문 모양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회양목 뒤에는 아담한 석물들이 서 있다. 석등과 불상, 문인석은 배롱나무, 향나무, 대나무 등 제각기 다른 색조로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지며 각별한 경치를 만들어낸다.

올봄 부산박물관은 110여점의 불교미술품으로 꾸린 대규모 특별전 ‘치유의 시간, 부처를 만나다’(7월10일까지)를 열었다. 조각, 불화와 사경, 공예품 등 전국의 이름난 사찰과 박물관, 미술관 소장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작에는 국보 3점과 보물 12점, 지방유형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높이가 10여m에 달하는 괘불에서, 불상 속에서 나온 새끼손톱보다 작은 구슬에 이르기까지,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잊고자 했던 사람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착한 마음의 다양한 얼굴들

승려들의 단정한 손을 비춘 도입부 영상을 지나 청록색으로 꾸민 전시실에 들어서면 빛나는 불상과 보살상을 만나게 된다. 통일신라부터 조선으로 이어지는 불교 조각의 흐름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다. 우선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금동보살상이다. 균형이 잘 잡힌 신체와 당당한 자세, 선명한 이목구비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운 태가 돋보인다. 지그시 내리뜬 눈과 살짝 힘주어 다문 입술이 단호한 인상을 주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살의 얼굴을 보면 입가와 볼에는 이미 은은한 응낙의 미소가 어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희랑대사 초상 조각, 고려 10세기, 경남 합천군 해인사 소장.

한편, 고려 초 삼베에 옻칠을 겹치는 건칠(乾漆) 기법으로 새긴 노스님의 얼굴에서는 세월에 누긋해진 순한 슬기와 기품이 넘친다.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던 희랑대사의 초상 조각이다. 재작년 국보로 승격된 뒤 처음으로 경남 합천군 해인사 밖으로 나온 이 작품은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하는 표정이 진열장 유리에 거울처럼 비친다. 작품 뒤쪽에 서서 희랑대사 어깨 너머로 그 그림자를 넘겨다 보면, 끝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큰스님의 내면으로 들어온 듯한 신선한 느낌이 든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조각 중에는 그 어떤 비극과 실패도 이들에게 달려가 고하고 나면 어깨가 가벼워질 것처럼 너글너글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멋쟁이 보살들도 있다. 이렇게 인자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얼굴들을 바라보다 보면, 그 모두가 착하고 어진 마음들을 표현한 것임을 깨닫는다. 착한 마음이란 얼마나 다양한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갑갑한 것 많은 삶이 한결 개운해지는 듯하다.

한번에 같이 비는 모두의 행복

불복장(佛腹藏)은 막 제작을 마친 불상이나 불화에 성물과 경전 등을 넣어, 부처의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고려시대부터 700여년간 불가에서 전승된 한국 불교의 유서 깊은 전통이다. 복장물을 전시한 공간 벽에 입힌 노란색은 의식에서 모든 복장물을 마지막으로 감싸는 황색 보자기의 색이다. 전시실 전체를 부처 안에 깃든 한 벌의 불복장처럼 둘러싸는 이 전시 디자인은, 불교 의례를 잘 모르는 이들도 설레는 공경의 마음으로 색색의 비단과 보석, 은그릇 등을 살펴보게 한다.

불상 제작과 수리에 참여하거나 복장물을 시주한 이들의 이름과 소원을 적은 발원문은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자료이다. 1351년에 완성된 해인사 금동보살상은 발원문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시주자만 130명,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 여백에는 무려 4천여명이 이름을 남겼다. 영화관에서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자리를 지키는 관객처럼, 받침대 위에 길게 펼쳐진 종이를 눈으로 따라가보면 어떨까.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상 발원문에 적힌 소원은 대개가 극락왕생인데, 마지막 한 구절에서 마음이 뭉클해진다. ‘나와 다른 이들이 일시에 불도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잘되기를 빌며 붙인 ‘일시에’라는 단서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때문이다. 나부터 잘되고, 나만 잘되기를 바라는 좀스러운 차별 없이 탁 트인 진심. 한번에 모두의 행복을 비는 그 진심이 바로 자비심일지 모른다.

연꽃 속에 이어지는 작은 세계들

이 전시의 대미는 대형 불화들이 걸린 붉은 방이다.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보물)를 시작으로, 좀처럼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대작들에 둘러싸인 관람객들의 눈빛은 수월관음보살을 바라보는 선재동자처럼 빛난다. 1565년에 화승 탄원이 제작한 <영산회상도>는 7장을 이은 삼베를 붉게 칠한 바탕에 하얀 선으로만 부처와 보살, 신중들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로 민간에서 불화를 그리는 기법이었으나, 오늘날의 눈에는 이런 독특한 화면이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의 경이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한다.

<수월관음도>, 고려 14세기, 보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한편 정교하게 채색된 조선시대 불화들은 사람들의 고통을 달래는 것들이 많다. 병을 낫게 해주는 약사 부처나, 죽은 뒤에도 괴롭게 떠도는 영혼과 아귀들에게 음식과 설법을 베푸는 수륙재 장면은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아픔과 두려움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세상에서 아직도 질병과 전쟁과 기아가 사라지지 않아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이 위로들이 유효하다는 것이 잠시 슬프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은 부처 대신 무엇의 힘에 의탁해 괴로움에서 달아나고 있는가 돌아볼 때, 경북 예천군 용문사의 <화장찰해도>가 눈에 들어온다. 파란 바다 위에 뜬 커다란 연꽃 속 이상세계를 이 그림은 111개의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각각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원들이 서로 합쳐지지도, 외따로 떨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 연결되며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모습은 독립과 고립 사이를 오가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희망과 위안을 전한다.

이 전시를 보고 나면, 한번쯤 초여름 해진 뒤 못가를 지나 긴 산책을 하고 싶어진다. 여름밤에 빛나는 연꽃송이마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고 있다는 상상을 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출근길 계단 아래의 빼곡한 뒷모습들에서, 피로의 바다 너머 세계를 발견하는 서늘한 너그러움이 이 여름 내내 내 눈에도 서릴 것만 같다.

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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