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배수찬과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2022. 6. 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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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으로 처음 조국에서 경기한 배수찬과 그 배경에 보이는 구름 관중. (출처=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캡쳐)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배수찬 (1937. 7. 5 ~ 1986) 재일동포 2세, 본적 경북 성주, 학력 일본 에바라(荏原)고,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 제2회 대회 참가, 제3회 아시아선수권대회(59년 6월 일본) 국가대표,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63년) 국가대표, 교통부, 기업은행, 포항제철, 연세대, 프로야구 삼미, OB 코치. 85년 OB 2군 감독을 맡았으나 돌연 그 해 말 아르헨티나로 이민. 86년 지병인 당뇨병으로 일본서 사망.

분단 후 한국의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으나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야구선수, '한국야구 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배수찬의 프로필이다.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2015)을 찍으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다룬 바가 있다. 많은 시간 재일동포와 인연을 맺어오면서 여러 운명들을 만났지만, 배수찬 역시 그 시대 조국과 재일조선인의 어두운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람 중 하나다.

도쿄의 가난한 재일조선인 가정에서 태어난 배수찬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야구를 좋아했다. 그는 도쿄조선중급학교에서 야구를 했다. 배수찬이 중학교를 다니던 50년대 초반은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폐쇄하고 '도립조선인학교'를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는 조선학교에도 야구부가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명문 에바라(荏原)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면 프로야구계로부터 스카우트를 받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귀국 후 기업은행 선수 시절의 배수찬. (출처=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캡쳐)

1957년,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조국이 그를 부른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3년 후인 1956년, 한국야구계는 불황을 타파할 돌파구를 재일동포에게서 찾았다. 일본 전국에서 야구 잘한다는 명문 학교를 찾아다니며 소속 학생 중에 재일동포를 찾고 이들을 모아 팀을 꾸렸다. 한국 야구계와 인연이 있는 민단 체육계 사람들이 일을 도맡았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제1회 '재일동포 학생야구 모국방문단'이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관객들은 선진야구를 직접 눈으로 보는 기회였고, 선수들에게는 그들과 시합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의 야구 학교들과 순회 경기를 펼치는 구장에는 연일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매년 8월의 이 성대한 야구 축제는 이후 69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72년 한국일보 주최의 봉황대기 야구대회에 '재일동포'팀으로 다시 오게 되는데 IMF가 닥친 1997년까지 참가했다. 무려 41년, 해마다 8월, 총 620여 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다녀갔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소속으로 고교 시절 한국에 처음 온 야구인에는 그 유명한 장훈이 있고, 김성근이 있다. 야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아라이 다카히로와 카네모토 토모아키를 잘 알 텐데 이들 역시 고교 시절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으로 한국에서 경기를 했다.

배수찬은 고교 3학년 때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부름을 받았다. 1957년 제2회 대회였다. 그는 투수로 출전하여 16경기 중 11경기에 등판했고 놀라운 기량을 발휘했다. 당시 배수찬의 투구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1959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영주귀국을 결심한 배수찬은 1960년 교통부에 입사하여 실업 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고의 전성기였던 60년대 후반, 인생의 변곡점이 발생한다. 의외로 야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 때문이었다.

배수찬이 조국에서 야구를 하고 귀국할 때 받은 사진과 사진 뒷면의 글. 한국에서 사귄 친구에게서 받은 글이다. (출처=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캡쳐)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대통령 박정희가 기거하는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다.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한 그들은 경찰의 검문으로 총격전을 벌이고 도주하다 군경의 소탕 작전으로 31명 중 29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거대한 충격파를 남겼다. 이후 예비군과 육군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태가 터진 직후 동해상에 정찰 중이던 미 해군 소속의 프에블로호가 북에 나포되어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 여파가 실업 야구 스타 배수찬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운명이 발목을 잡았다. 어느 날 동대문 경기장에서 야구를 마치고 사라진 배수찬은 40일 만에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왔다. '한국야구의 원류'를 쓴 저널리스트 오시마 히로시에 따르면 당시 김성근도 잠시 사라졌다고 한다. 김성근은 배수찬의 권유로 한국에 들어와 야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말을 몰랐던 김성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배수찬이기에 둘은 각별한 사이였다.

'김성근은 테니스장 크기의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방으로부터 고문에 의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조사관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선배인 배수찬의 친구 관계, 행동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특히 일본에 있는 누나를 만난 적이 있는지를 주로 캐물었다.' <한국야구의 원류> 오시마 히로시 중에서

김성근은 1959년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당시 한국 대표로 도쿄에 온 배수찬을 따라 그의 누나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으나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근은 곧 풀려났으나 배수찬은 40일 동안 끝나지 않는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누나는 총련계였다. 1959년 말부터 시작된 '귀국 운동'으로 어머니가 60년에 북으로 갔다고 한다.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을 때 어머니의 귀국을 조금만 늦추어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발각될까 안 그래도 전전긍긍했다. 북으로 간 어머니, 총련계인 누님과 얼마나 접촉했는지 철저히 조사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 사건은 배수찬의 인생을 바닥에서부터 흔들었다. 풀려난 이후 그는 좋아했던 술에 집착했다. 실력은 떨어지고 더 이상 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코치로 전환했다. 이곳저곳 실업 야구, 대학 야구를 전전했다. 당뇨병이 심했다. 합병증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공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선수들에게 공을 쳐 줄 수도 없었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배수찬을 그대로 볼 수 없었던 아내는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결정했다. 붙잡는 사람도 없었다. 조총련, 북과 관련 있는 인물을 야구인들도 외면했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아르헨티나 이민 후 배수찬은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은 나날이 깊어갔다. 휴식을 위해 태어난 일본을 찾았다. 거기 누님의 집에서 잠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거리에서 쓰러졌다. 급성심장발작이었다. '한국야구 인명사전'에 기록된 당뇨병과는 달랐다. 그의 마지막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디에도 기록된 바가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그 소식을 접한 아내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고 깊은 좌절과 분노, 우울로 8개월을 앓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의과대학을 다니던 첫째 딸이 동생들을 건사하고 있었다. 학교는 그만두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의 시신은 7년 동안 일본에 있다 가족이 한국의 본적지에 모셨다고 한다.

배수찬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각광받던 야구선수로도 기억되지 않았고 훌륭한 야구감독으로도 기억되지 않는다. 야구계에서 단 한 번의 추도식도 없었다.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74년 문부식 사건으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을 때 마침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경기 기간이었다. 모든 경기가 취소되고 호텔에서 나오지 말라는 엄포가 내려졌다. 지금 거리에 나갔다가는 재일동포라는 이유만으로 몰매를 맞는다는 거다. 안 그래도 가끔 거리를 나가면 한국의 어른들이 다가와 한국말을 못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반쪽발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5·60년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경기할 때는 야구장 주변의 커다란 나무에 사람들이 매달려 구경할 정도였다. 입국할 때는 거리 퍼레이드를 열었고 귀국할 때는 여학생들의 팬레터를 가방에 한짐 싣고 가야 했다. 한때는 귀한 손님이었던 그들이 시간이 지나자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는 금세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다.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620여명의 41년 동안의 자취가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의 프로야구는, 한국의 역사는 '망각'을 먹고 지금 여기에 있다.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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