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커피'를 봉쇄하자, 독일이 궐기했다

곽아람 기자 2022. 6.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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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우스이 류이치로 지음|김수경 옮김|사람과나무사이|329쪽|1만8000원

일단 퀴즈부터. 다음은 카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중 한 구절입니다. 는 무엇일까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의해 발생한 설탕과 의 결핍은 독일인을 반나폴레옹 봉기로 내몰았다. 빛나는 해방전쟁의 토대는 이렇게 마련되었으며, 설탕과 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19세기의 의의를 과시했다.”

정답은 ‘커피’.

1806년 10월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그해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을 선포해 대륙을 봉쇄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란 대륙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봉쇄하는 것이다. 천재적 전략가 나폴레옹은 강대국 프로이센의 항복을 받아낸 후 대서양과 지중해에 이어 발트해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해양 봉쇄 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커피 유통을 전면 금지해 서인도제도에서도 자바에서도 커피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폴레옹은 왜 느닷없이 커피 수입을 전면 금지했을까? 자신이 내린 대륙봉쇄령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데 커피가 최적의 척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보나파르트는 영국 물가표를 끊임없이 면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커피가 금값에 거래된다는 걸 확인하고는 대륙봉쇄령 효과에 만족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멸망을 초래했다. 각종 뿌리나 홉을 우려낸 ‘대용 커피’에 질린 독일인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나 반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참여했다. 온나라 국민이 각성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이 라이프치히 전투(1813)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무찔렀다.

도쿄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커피를 둘러싼 세계사의 흐름을 박진감 있게 풀어간다. 전공은 독문학이지만 ‘아우슈비츠의 커피’ 같은 저서를 집필했을 만큼 저자의 커피 지식은 ‘잡학’의 경지를 초월해 깊고 방대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커피는 ‘카와(Qahwa)’라고 불렸다. ‘카와’란 ‘무언가를 향한 욕망을 없애다, 적게 하다, 조심하다’라는 뜻인데 이는 식욕을 억제하는 커피의 속성과도 맞아떨어진다. 가벼운 백포도주 역시 ‘카와’라 불렸는데 지금은 와인이 식전주로 여겨지지만 이 시기 이슬람에선 식사를 피하거나 줄이기 위해 와인을 마셨기 때문이다. 저자는 “커피는 본래 와인이었다”는 커피의 탄생에 대한 속설이 이런 까닭으로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인 커피 무역항인 ‘모카’를 보유한 예멘의 수피교(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들은 졸음을 쫓으며 수도하기 위해 각성 효과가 강한 커피를 개발해 마셨다. 커피는 15세기 말 즈음 “습자지에 먹물 번지듯” 이슬람권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16세기 초엔 카이로의 모스크 등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예배 드리는 수피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여럿이 둘러앉은 채 병에 담긴 커피를 작은 그릇으로 퍼 올려 서로에게 권하며 호호 불어가며 마셨는데 위정자들은 이를 신성 모독에 가까운 행위로 보았다. ‘호흡’을 생명의 숨결이라 여겨 중시했던 이슬람 문화에서는 요리가 뜨겁다 해서 입으로 부는 것을 금기시한다. 뜨거운 액체를 호호 불어가며 권커니 잣거니 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다.

1511년 5월 20일 메카의 총독 카이르 베그는 모스크 한구석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일군의 무리를 발견한다. 그는 의사들을 매수해 커피가 심신에 피해를 준다고 주장했다. 이후 메카의 길거리에서 커피콩을 볶거나 커피를 판매한 자, 커피를 마신 자는 모질게 채찍질을 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반대파의 격렬한 저항으로 ‘커피 탄압’은 막을 내린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에 기록된 대표적 커피 탄압 사건인 ‘메카 사건’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는 커피가 승리의 브이 자를 그리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교수가 쓴 책이니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할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대목을 놓치지 않고 너스레 떠는 솜씨도 탁월한 책. 1714년 8000여 곳에 달했던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1739년엔 551곳으로 줄 만큼 급격하게 쇠락한 것은 여성의 출입을 배제했기 때문이라는 통찰도 빛난다. 남녀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한 문화는 결국 쇠퇴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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