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전쟁을 겪은 여자'들의 '뜻밖의 여정'

2022. 6. 1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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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와중 유년기 보낸 윤여정
홍보 위해 쓴 이면지 글 인상적
그의 친구 정자님과 꽃분홍님
끈끈한 동지애에도 깊은 존경

지난해 아카데미상 수상자 윤여정은 올해 시상식 참석과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 홍보차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했다. 이미 몇 편의 예능을 함께한 나영석 피디는 이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10박11일 여정을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다. tvN의 ‘뜻밖의 여정’이 그것이다.

윤여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버린 지금, 지난달 방영하자마자 이미 무수히 많은 지면에서 앞다퉈 소개한 이 프로그램을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녀의 글로벌한 성공이나 한류 콘텐츠의 우수성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다만 나는 그녀가 ‘파친코’ 홍보를 위해 그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한국 역사를 영어로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A4용지 몇 장에 이르는 글을 써두고 보고 또 볼 때 경탄했다는 말은 덧붙이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 글이 이면지에 쓰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는 제작진을 향해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은 ‘전쟁을 겪은 여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 경탄이 극에 달했다는 사실도.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직전인 1947년 태어나 6·25의 와중에 유년기를 보내며 휴전 이후 1954년에서야 가까스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 청년기를 보내야 했을 그이 세대의 평생의 내면적 긴장이 윤여정이란 배우를 통해 머나먼 미국 땅 LA에서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장면은 나에게 묘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녀의 오랜 ‘절친’으로 소개되는 여성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30대에 도미한 후 최근까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일하며 4년 전 텔레비전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에미상을 받았다는 ‘정자’님이나 윤여정의 미국 여행에 늘 동반한다는 라스베이거스의 ‘꽃분홍’님 등은 ‘전쟁을 겪은 여자’들의 끈끈한 동지애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유년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많은 것이 부족하고 모자라던 궁핍의 나날들, 똑똑하고 야망 있는 여자아이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모른 체하는 사회, 어쩌면 그 가난과 차별의 기억들이 이들을 미국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이들은 행복했을까. 비로소 전쟁과 차별을 잊고 안식과 풍요를 만끽했을까. 세상사가 이런 동화처럼 마무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의 이민 생활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기회의 땅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미나리’의 젊은 부부의 곤경은 이들의 삶과 겹치는 대목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10여 년의 미국 이민 생활을 접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윤여정의 이민 실패사가 이들의 고단한 ‘여정’을 웅변한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삼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살아남아 ‘생존자’의 기쁨을 만끽한다. 윤여정은 아카데미가 제공하는 리무진을 타고 시상식장에 가서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각장애인인 올해 남우조연상 수상자 트로이 코처에게 상을 수여하며 수어로 기쁨을 전달했다. 검정 드레스에 우크라이나 난민을 지지한다는 의미의 파란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꽃분홍’은 친구가 10시간의 촬영을 견디고 집에 돌아와 라면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정자’가 새로 리모델링한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할리우드 힐스에 자리한 정자네 이웃은 타란티노 감독,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그리고 게티이미지의 재벌 폴 게티 등이다. 아니 그들의 이웃이 ‘김정자 울프’ 감독이다.

‘뜻밖의 여정’은 이렇게 ‘전쟁을 겪은 여자’들의 ‘현재’로 마무리된다. 아직도 LA에는 동화가 현실이 되는 일이 없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들이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대신 왜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는 알겠다. 여정의 여정을 모르지 않기에. 그것은 자신들의 여정이기도 하니까. 눈을 감으면 두려움에 떨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비행기를 타는 젊은 여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여자아이들이 그 여정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녀들의 여정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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