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현의 '옛 신문 속 강원도 읽기'] 42. 태봉국 궁예왕 유적지를 찾아

박미현 2022. 6. 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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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철원 평야 '만고영웅' 이상세계 개척 꿈 서려
100여년 전 신문 태봉국 역사·흔적 조명
수도 철원·왕릉 소재지 평강 유적 소개
궁예 소재 한시·산문 작품도 다수 실어
총독부 관료 고적 조사기 연속 기고
'철원 석등 보존' 보도 유적 관심 시사
평강 삼방역 궁예신당 등 답사기 눈길
1936년 5월 7일자 매일신보에 ‘이씨의 기지 기부로 궁예고적 개수 천 여 년 역사 가진 불상, 석등 철원의 자랑 갱생’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일부. ‘풍천석탑’으로도 불린 태봉국 석등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배우 김영철은 요즘 동네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는 TV 프로그램 ‘동네 한바퀴’로 친근하나 아직도 궁예왕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도 적잖다. 2000~2002년 만2년 넘게 방영된 TV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왕 연기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궁예왕=김영철’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편찬 시기가 정치사회적 의도 아래 고려의 정통성을 강화할 무렵이니 궁예왕은 승자 기록에서 우호적으로 표현될 리 만무했다. 더구나 대중적인 드라마가 이미지를 덧씌우며 고착됐다.

이와 달리 학계에서는 후삼국시대 조명에 적극적이었다. 궁예왕 활동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관점에서 조명과 평가를 계속했다. 부패한 신라 사회에 저항해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 새로운 나라를 열도록 역사적 전환을 가져온 군주로서의 위상이다. 그가 건국한 태봉국(후고구려, 마진국)의 체제와 제도는 대개 고려에 계승돼 초석이 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시보의 박재청 기자가 금강산 근참기 속편에서 철원 현지를 ‘남성다운 철원의 평야와 비장한 궁예의 옛싸움 터’라며 답사기와 감회를 담은 시조 4편을 보도했다. 고려시보 1935년 10월 16일자 8면

궁예왕에 대한 기억은 강원도내를 비롯한 전국 여러 지역에 전설과 지명으로도 굳건히 살아있다. 태봉국 수도인 철원을 우리말로 하면 ‘쇠벌’인데 ‘셔블’ ‘서벌’ 등과 마찬가지로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동음이의어이다. 철원은 1000여년의 역사를 겪으면서 ‘태봉국 수도’라는 가장 강력한 사회문화성을 발휘하고 있다.

100여 년 전 발행된 옛날 신문에도 궁예왕이 등장한다. 지금처럼 태봉국 궁궐 유적이 분단된 비무장지대에 갇히지 않았던 때이고, 경원선 철로가 개설돼 철원이 신흥도시로 유명세를 더할 때였다. 궁궐 자취가 있는 태봉국 수도 철원, 궁예왕릉이 있는 평강, 활동이 빛났던 원주 영원사 등 유적 소개 기사가 실렸다.

황성신문 1906년 8월 11, 21일자 ‘대동고사’ 코너에 철원 풍천원과 원주 영원성 유래를 각각 소개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7일자에는 강원도 평강 명물 소금강이 ‘궁예왕 피난처’로 소개됐으며, 1926년 12월 21일자에는 ‘궁예왕묘’ 유적지를 알렸다. ‘태봉왕 궁예’의 묘는 삼방약수포 가는 도중에 있다는 설명이다. 1929년 4월 12일자 중외일보에는 ‘궁예축성지’를 소개했는데, 궁예왕이 철원에 도읍했을 때 축성하였던 궁성이라며 장구한 세월 속 자취가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태봉국과 궁예왕을 소재로 쓴 한시와 산문 작품도 여러 건이다. 1915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에는 무불진인이 지은 한시 ‘궁궐리 만감 궁예왕 고지(故趾)’가 칠언시로 게재됐다. 동아일보에는 ‘어린 시절의 궁예’ (1937년 11월 14일자)와 ‘궁예와 유모의 손’(1938년 2월 3, 4일자) 이라는 글이 실렸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일본인 관료 가토 간가쿠(加藤灌覺) 일행이 1929년 12월 철원을 현장 방문해 몇 달 동안 태봉국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사실이 보도됐다. 1930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에 ‘태봉왕국 유지 조사 귀중품 다수 발견, 약 천 년 전에 궁예가 도읍한 곳 월정리에 구지(舊址) 상존’이라는 긴 제목으로 실렸다. 당시 유적지에 대해 ‘성벽은 원래 석조였으나 지금은 서북편이 남아있을 뿐으로 전부 토조가 되었고 성 남에는 현무암의 사이로부터 구슬같은 맑은 샘이 솟고 있는데 이는 궁예가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세우고 음양오행설의 ‘수덕으로써 왕이다’란 바에 합치되므로 도성을 이에 정함인 듯 하고 유지는 모두가 신라예술의 계통’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석탑 1기, 장명등 1기, 부속 기단석 여러개, 귀부 1개, 옛 사찰(사원)의 지주석 10여개, 석불 1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사진설명 제목은 ‘태봉왕국 도성의 유지’이다. 궁예왕의 연호가 유래됐다고 추정하는 샘과 성터 주춧돌 사진을 싣고 있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총독부 가토 일행이 유적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옛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 등을 많이 가져와 연구키로 했다는 대목으로 이 유물들의 행방이다. 더욱이 가토는 조선총독부 일본어 기관지 경성일보에 ‘태봉국의 고도를 따라’ 조사기를 1930년 3월 20, 23, 25, 26일자 4회에 걸쳐 기고할 정도로 관심이 컸기에 유물 이동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1936년 5월 7일자 매일신보에는 ‘궁예 고적 개수’ 기사가 실린다. 철원에서 고적보존회를 조직해 홍원리에 있는 ‘궁예 성지’ 토지 소유자인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서망동의 이정운과 교섭해 땅 100여 평을 기부 받아 황량한 터를 다시 아름답게 하고 통행 도로까지 고쳐 관람객 편의를 꾀했다는 뉴스이다. ‘천여년 전에 궁예왕이 건설한 태봉국 유지의 전모가 완전히 나타나게 됐다’며 옛 자취가 완연하다고 석등 사진을 함께 싣고 있다.

▲1926년 9월 3일자 동아일보에 ‘경원선의 여름을 찾아(3) 삼방유협’ 연재기사에 궁예왕을 봉안한 신당인 ‘태봉당’을 찾은 소감과 사진을 함께 실어 소개한 기사 일부. 사진의 동그라미 친 부분은 ‘태봉당’이다.

1938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1천여 년 전의 궁예고적 철원의 풍천원 고등을 화장 곡식 재배를 금하고 나무 심어’ 라는 보도가 있었다. 월정리분국발로 실린 이 기사는 ‘곡식 한 알이라도 귀한 처지여서 석등 밑에까지 곡식을 심고 거두면서 잡곡과 잡초가 우거진 상태가 돼 주변에 대지를 넓혀 벚나무를 심어 돋보이게 할 계획’이라고 알리고 있다. 이어 1939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태봉 유물인 석등 보존키로 결정’ 기사가 실렸다. 유적 보존에 대한 관심이 지속됐음을 알려준다.

신문기사 중 단연 시선을 끄는 것은 여행기이다. 교통편이 열악하고, 여행이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어서 현장 사진까지 곁들여 흥미를 돋웠다. 서울이나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철원 월정리역이나 평강 삼방역에 내려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궁예왕 유적지를 돌아보는 답사기가 종종 보도됐다.

요즘이야 ‘궁예’로 부르지만, 옛 신문에서는 ‘궁예왕’으로 깍듯이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1926년 9월 1일자부터 동아일보에 실린 ‘경원선의 여름을 찾아’ 연재 여행기에도 ‘궁예왕’으로 표현됐다. ‘CK생’이라고 밝힌 필자는 8월 28일 서울을 출발, 1주일 정도 경원선을 끼고있는 도시를 여행하면서 13회에 걸쳐 답사기를 실었다. 9월 3일자 3면에 보도한 연재 3회 ‘삼방유협’편에 궁예왕이 등장한다. 삼방역에 내린 뒤 걸어서 ‘궁예신당’을 찾아간 일정이 사진과 함께 실려있다.

‘이런 산중에는 평원이라고 할 만한 거친 풀판에 게다가 어두침침한 황혼에 우뚝이 하늘에 솟은 듯한 외나무는 천층만층 높아 보이고, 천년만년이나 늙어 보이며, 혼이 있어 금방으로 말을 할듯해 보이며 그 앞을 지나갈 때에 무시무시합니다’라며 궁예신당의 독특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어 ‘멀리 보면 모르겠고 가까이 가보면 머루넝쿨 우거진 속에 기와지붕이 보이니 이것이 태봉당이라 하여 궁예의 혼을 제사하는 신당이오. 그 신당있는 곳을 태봉궁 옛터라 하옵니다. 궁예도 간 지 이미 천년을 지났으나 영웅의 자취가 푸른 풀뿐이외다. 저 우뚝이 솟은 전나무들 천년이나 살았을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영웅의 펴다 못 편 뜻이 아닌가 하여 슬픕니다.’라며 감회를 밝히고 있다.

1931년 9월 16일자 조선일보는 ‘13도 정형 소개판’ 철원군 편에서 철원군의 정체성을 ‘철원은 거금 천여 년 전 궁예왕의 도읍처이다. 신라의 말년 궁예는 조선의 동부-철원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구지를 점령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했다’며 풍천원 궁궐터가 현재 철원수리조합 배수도와 불이회사 권농장으로 변했다고 전하고 있다. ‘궁예왕릉’을 조성한 경위도 소개하고 있다. 왕릉은 궁예왕이 절명한 자리로 절치통분해 쓰러지지 않고 선 채로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서 있는 그대로 돌각담으로 둘러쌓고 당각을 지어 능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능역 안에는 본래 큰 홰나무 둘이 섰는데, 궁예 충신의 혼령이 나무가 돼 궁예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 몇 년 전 홰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고 알렸다.

▲192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5면 ‘향토예찬 내고향 명물’ 코너에 강원도 평강군 소금강이 ‘궁예왕 피난처’로 소개됐다. 기사 중 일부

동아일보 임병철 기자는 1935년 8월 10일자 8면에 ‘북악산아 잘 있거라! 조숭 백두 뵙고오마 궁예고도 철원 광약 지점할 재’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1933~1941년 개성에서 발행된 한글신문 고려시보의 기자 박재청은 철원을 찾아 취재한 기사를 1935년 10월 16일자에 실었다. 현장을 ‘남성다운 철원의 평야와 비장한 궁예의 옛 싸움터’로 규정하고, 민족정서를 기사에 풀어냈다.

‘이 벌은 신라의 말년 희세의 대영웅 궁예의 활약하였던 철원평야이니 궁예가 삼군육사를 조련하던 말 발자국이 지금도 저 벌 풀숲에 숨기어 있을 것입니다. 실로 이 땅에 일어났던 궁예는 그 지리를 얻었다 할 것입니다. 넓으나 넓은 뜰에 마초(馬草)가 무한하고 가이없는 평원에 용무(用武)가 족할 것이니 여기사 단련한 강군과 여기사 살찐 말로 그 때 그만한 무용(武勇)을 날리었음도 필연한 일입니다. 만약 이만한 중요지가 없었던들 반정(反征)한 왕건 태조 해내(海內)를 통일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중략) 근 300리 펼쳐진 시원시원한 벌판은 참으로 천하 막강의 용사를 양성할만한 곳입니다. 영웅 궁예가 삭풍설월 밤과 낮으로 삼군팔사를 거느리고 말 달리고 활 쏘며 통일의 웅도를 꿈꾸던 그 때를 생각하면 실로 한줄 비장한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박 기자는 현장의 감회를 시조로 지어 함께 보도했다.

쇠두레 넓은 뜰에 칼 짚고 일어나니

만군 천병이 평기(平旗) 하에 모였구나

아마도 만고영웅은 궁예신가 하노라 (이하 생략)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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