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과는 없고 노사 갈등 불씨로.. 대법 '임피제' 무효 판결, 임금개혁 계기 될까 [심층기획]
해마다 줄어 국고 까먹는 방만 경영 자초
상·하위직 직무 배정 달라 추가수당 차별
대상자 주요 업무서 배제.. '골방' 간다 인식
대법 판결, 임금 삭감만큼 업무 감축 핵심
일부 공기업 일 똑같이 하며 임금만 깎아
국민銀·포스코 노조 임피제 무효소송 준비
"정부 임금체계 개편 빨리해야 대란 막아"
자동 승급 거의 없애 연공성 크게 완화
미타니 산업, 무기한 계속 고용제 도입
당국이 노동계 반발을 무릅쓰고 출범 초기부터 고삐를 당기는 배경에는 지난달 대법원에서 나온 임금피크제 위법 판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대법원은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깎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후 노동계에서 임금피크제 보완 및 폐지 요구 관련 소송이 쏟아지고 있다. 학계 등에서는 소모적인 논쟁 대신 위·편법 등으로 남용되는 제도의 폐해를 진단하고 임금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이달 초 기업 간담회에서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공정한 임금체계를 준비하겠다”며 공식석상에서 임금체계 개편을 처음으로 언급해 지원 사격했다.
◆공공 임금피크제 효험 미미… ‘잡음’만 무성
그간 공공 부문에 도입된 임금피크제는 구체적인 현황과 통계 자료가 제대로 취합되지 않아 현주소를 알기 어려웠다.
연구진은 준정부기관 6곳, 공기업 4곳을 선정해 운용실태를 분석했다. 일부 사례를 보면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A기관은 직원 급수별로 정년보장형과 정년연장형을 따로 운영하는 혼합형 임금피크제를 2016년부터 운영해왔다. 그러나 임금피크제를 통한 인건비 충당률은 도입 첫해인 2016년 100%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2020년과 지난해에는 70%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입사원들의 임금 인상분이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의 임금 삭감분보다 가파르게 상승해서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설계한 탓에 국고를 까먹는 방만 경영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인 B기관도 사정이 비슷해 이 기관 직원들은 임금피크제 폐지를 적극 주장하는 등 부정적인 기류가 강한 분위기이다. 다른 공공기관은 경력사원 선발이 조직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으나, 인건비 보전을 위해 상대적으로 돈이 적게 드는 신입을 선발하고 있다. 이런 차선책마저도 결국에는 인건비 충당률을 낮추게 돼 ‘미봉책’에 불과하다.
노사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할 임금피크제가 되레 조직 문화를 저해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A기관의 임금피크제는 상위 직급자(1∼2급)의 경우 기존 직무를 유지하면서 추가수당을 받아 종전의 임금 수준을 유지하지만, 하위 직급자(3∼6급)들은 다른 직무로 옮겨 추가수당을 받지 못해 임금이 크게 깎이는 구조다. 결국 형평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직급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시장형 공기업인 C기관은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에 대한 조직의 홀대가 만연해 정년을 앞둔 직원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있다. 지방의 한 공기업 직원은 “임금피크제 대상자가 되면 주요 업무에서 배제돼 ‘골방’으로 간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어쩔수 없이 이른 명예퇴직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다.
◆정년유지형 대다수… 위법 가능성도
아울러 조사 대상 기관 대부분은 대법원이 무효라고 판단한 사례인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택했다. 정년유지형이란 정년을 그대로 두고 임금만 삭감하는 방식으로, 임금 삭감 대신 정년을 늘리는 정년연장형과 구분된다.
임금피크제 주무 부처인 고용부 산하기관마저도 사정이 비슷했다. 본지가 고용부 산하기관 12곳의 임금피크제를 유형별로 조사한 결과 근로복지공단과 한국고용노동교육원 등 10곳에서 정년유지형 및 혼합형을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년연장형을 운영하는 곳은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등 2곳뿐이다.
위태롭게 운영돼 온 임금피크제는 대법원 판결을 고리로 공공과 민간 할 것 없이 불만이 표면화하고 있다. 지난 8일 공공기관 근로자들로 구성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용산 집회를 열어 “임금피크제 지침을 폐기하고 노조와 직접 교섭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민간 기업들은 더한 위기에 봉착해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산하 노조들은 임금피크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와 금속노조 포스코 지회는 임금피크제 무효 소송을 준비하는 등 법적 대응을 불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고용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상용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의 과반(52%)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드라이브로 2016년을 전후해 임금피크제가 민간에 뿌리를 내렸으나, 노사 갈등의 단초만 제공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노동계에 따르면 임금피크제는 ‘원조’ 시행 국가인 일본과 이를 벤치마킹한 한국 등 일부 국가에서만 운용하고 있다.
일본은 기업에 만연한 호봉제 탓에 정년을 앞둔 근로자의 임금 삭감을 2000년부터 선제적으로 운영해왔다. 전체 기업의 약 80%가 시행 중일 정도로 보편화됐으나, 이와 함께 특유의 ‘역할급(직무수행 능력 기준으로 보상)’을 확산시키면서 사실상 정년을 폐지하는 단계를 밟고 있다. 기계적으로 임금을 덜 주는 ‘피크제’만으로는 경영 효율을 확보하기 어려워 임금체계 개편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일본은 특히 고과승급에 있어 평가 대상이 되는 성과는 개인의 장단기 업적이 가장 많고, 자동 승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도록 해 연공성을 완화하는 추세다. 예컨대 화장품 유통 회사인 미타니산업은 지난해 무기한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60세 정년과 무관하게 고용을 유지하되, 6개월마다 성과를 평가받고 이를 상여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한국 역시 이를 타산지석 삼아 신속한 임금체계 개편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정식 임금체계를 갖춘 국내 기업 중 직무급을 도입한 곳은 10곳 중 한 곳(10.3%)에 불과하다.
정부는 보수체계 합리화를 위한 공공기관 직무급 도입을 확산하고, 이와 연계해 인사·조직 관리를 직무중심으로 전환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0년도 기준으로 공기업·준정부기관(131개) 중 18곳만 직무급을 도입했다. 기타공공기관을 포함해도 총 21곳에 그친다.
정부는 공공 부문의 임금개혁을 우선 추진한 뒤 민간 기업에 점진적으로 확산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직무급에 대한 노동계 반발이 거센 만큼 노사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대화가 매우 중요해졌다는 평가다.
안병수 기자 r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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