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국민들 손목 잘랐던 벨기에 유감 표명했지만..

박민식 2022. 6. 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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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고무채취에 콩고 원주민들 강제 동원
고무 할당량 못 채우면 손목 잘라 '잔혹 통치'
벨기에 국왕 "콩고 식민지배 유감" 표명
콩고 국민들, 공식 사과 없자 '분노'
선교사인 해리스 부부는 1890년대부터 벨기에령 콩고를 여행하면서 고무농장에서 아프리카인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사진으로 고발했다. 그린비 제공 한국일보 자료사진

위 사진 보이시나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때 찍힌 사진인데요. 흑인들이 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시면 그 '뭔가'는 바로 사람의 손, 원주민의 손입니다. 아마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벨기에가 통치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의 손을 저렇게 잘랐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우리 선조들의 귀와 코를 베어 갔던 일이 겹쳐지기도 하는데요. 얼마나 극악무도하게 통치했는지 직감할 수 있겠죠.

늦었지만, 콩고를 방문 중인 벨기에 필리프 국왕이 반성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는 지난 8일 콩고 수도 킨샤사 국회의사당에서 "식민통치는 폭력적 행위와 굴욕으로 이어졌다"며 "콩고인들과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과거 상처에 대한 깊은 유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말했습니다. 2년 전 유감 표명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쉽게 말하면 일본 국왕이 여의도 국회에 찾아와 유감 표명한 셈입니다.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식 사과는 없었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현지 콩고인들은 "우리 삶을 망친 자를 왜 초대했냐"고 비판하는 등 분노의 목소리도 냈는데요.

우리에게 달콤한 '와플'로 잘 알려진 나라 벨기에가 도대체 어떻게 콩고를 지배했기에 그런 걸까요? 콩고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진 속 흑인들이 왜 잘려진 원주민의 손을 들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중부 한복판에 넓게 자리 잡은 콩고민주공화국은 면적이 한반도의 11배에 달하는 234만4,858㎢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크죠. 인구(9,400만 명) 1억 명에 육박합니다. 적도가 지나가는 이 나라의 북동부 지역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산림이 울창한 열대우림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열대우림인 브라질의 아마존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이투리' 열대우림 지역인데요. 여기에는 1,800년대에 굉장히 귀한 자원이었던 고무나무가 풍부했습니다. 벨기에가 식민지 콩고를 잔혹하게 지배한 요인이 바로 고무입니다.


벨기에 레오폴드 2세, 콩고 식민 지배 '잔혹 통치'

아프리카 콩고 식민 지배 당시 '콩고의 학살자'라 불릴 정도로 잔혹하게 다스렸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 위키피디아

1865년 벨기에 국왕에 오른 레오폴드 2세가 식민지 개척에 뒤늦게 뛰어들면서 콩고의 잔혹사가 시작됩니다. 그는 1831년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한 벨기에의 첫 국왕 레오폴드 1세의 아들이자, 이번에 유감을 표명한 필리프 국왕의 증조부입니다. 레오폴드 2세가 식민지에 욕심을 냈던 당시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주요 서구 열강이 이미 상당한 식민지를 건설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레오폴드 2세는 틈새시장을 노려 아프리카에 눈을 돌렸죠. 아프리카를 잘 알고 있던 영국 출신의 미국 언론인 겸 탐험가 헨리 스탠리를 고용해 "경비를 대 줄 테니 이투리 우림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합니다. 스탠리는 이 지역을 탐사한 후 400여 원주민 부족과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합니다. 노예무역 근절, 문명화 등을 명분으로 내걸고, 족장 등 지도자들에게 푼돈과 헐값의 유럽 상품을 쥐여주고 주권 이양조약을 체결합니다. 스탠리는 거의 사기나 다름없는 이런 방식으로 확보한 콩고 땅을 레오폴드 2세의 사유영지(私有領地)로 만들어 주죠.

아프리카의 분할을 논의하기 위해 1884년 독일 베를린에 모여 회의(베를린 회의)를 열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들은 중앙아프리카 일대에서 레오폴드 2세의 지배권을 인정해 줍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콩고자유국'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의 작은 나라 벨기에는 자국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콩고를 1960년까지 식민지로 지배합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이름과 달리 그는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통치합니다. 처음에는 코끼리의 상아를 수집하면서 부를 축적하다 값이 뛰는 고무로 눈을 돌립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원자재 수요가 크게 늘었는데, 자전거 바퀴, 자동차 타이어, 전선의 절연재 등에 사용되는 고무 수요가 폭증해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겁니다. 주요 고무 생산지인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 고무나무가 사라지자, 영국이 식민지인 인도나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묘목을 심었는데 아직 성숙한 나무가 부족했던 겁니다.

이런 상황은 레오폴드 2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죠. 그는 원주민 1인당 말린 고무 3~4㎏을 2주 안에 채취하도록 합니다. 말린 고무는 고무나무에서 고무분 유액(라텍스)을 채취해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얻어야 하니까, 할당된 양보다 훨씬 많은 원료를 가져와야 했겠죠. 할당량을 못 채울 경우에는 하마 가죽을 말려서 만든 채찍으로 매질을 당했습니다. 맞아서 의식을 잃거나 목숨을 잃었죠. 고무 채취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군대의 공격을 받아서 몰살당하기도 했습니다.


고무 채취에 원주민 강제 동원... 할당량 못 채우면 손목 잘라

레오폴드 2세 식민 지배 당시 손이 잘린 콩고 원주민들. 벨기에는 고무 수확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의 신체를 훼손하는 학대를 자행했다. 위키피디아

또 벨기에 군인들은 2주에 3~4㎏씩 바쳤는지 점검 감시하는 일을 원주민 군인에게 시키고, 제대로 일하지 않은 사람은 총을 쏴 죽이라고 총알도 지급합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체의 오른손을 훈증 처리해서 가져오라고 하고요. 할당량이 비현실적이어서 채울 수 없으니까 총알 하나당 살아 있는 사람 오른손을 잘라 훈증 처리해 가져가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고무나무 가지를 보이는 족족 잘라 가져가니까 고무나무가 사라지고, 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가야 하다 보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은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아내나 어린 자녀의 손목도 잘랐다고 합니다. 맨 처음 봤던 위 사진,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이처럼 비인간적 만행을 저지른 레오폴드 2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콩고에서 1㎏의 고무를 채취해서 벨기에의 본사까지 보내는 데 0.13벨기에프랑밖에 안 들었는데, 그곳에서 1㎏이 10프랑에 팔렸다고 해요. 무려 700% 이상의 엄청난 이윤이 남는 장사였던 겁니다.

콩고로부터의 고무 수출량도 1890년 100톤에서 1901년에는 6,000톤에 달할 정도로 폭증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됐겠죠. 미국 UC버클리대의 아담 호크쉴드 교수는 자신이 쓴 책 '레오폴드왕의 유령'에서 벨기에가 이 지역에서 학살한 원주민을 1,000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그에 비례해 원주민들의 손목도 잘렸다는 얘기입니다. 콩고 국민들의 분노가 이해되시죠? (당시 아프리카 인구에 비춰 수십만 명 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벨기에 "경제발전 기여" 모르쇠... 진심 어린 사과·반성 없어

2020년 6월 10일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옛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페인트와 낙서로 훼손돼 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유럽 각국으로 확산하면서 최근 벨기에 국내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잇따라 수난을 당하고 있다. 브뤼셀=AP 연합뉴스

레오폴드 2세의 잔혹한 만행은 선교사 등에 의해 외부에 알려지고, 1900년쯤 언론에 보도됩니다. 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폭발합니다. '콩고의 학살자'라는 악명도 얻습니다.

그러자 벨기에 브뤼셀의 콩고행정관은 관련 서류를 태우며 '증거인멸'에 돌입하는데요. 24시간 다 태워도 없애지 못할 정도로 잔혹사 관련 서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손목을 잃거나 희생당한 사람이 많았다는 겁니다. 1908년 사망한 레오폴드 2세는 끝까지 콩고에서 벌어진 학살을 몰랐다며 잡아뗐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 벨기에에 병합돼 통치받던 콩고는 1960년 독립합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 통치로 번 돈으로 수도 브뤼셀에 공원과 궁전 등 여러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후손들은 그를 '건축왕'이라 부르며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조성했습니다. 그의 악행은 얘기하지 않고, 선행만을 기리고 있는 거죠. 벨기에도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식의 주장을 되풀이한다고 해요. 일본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유사하네요.

2020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레오폴드 2세가 그 유탄을 맞기도 했습니다. 벨기에에서 레오폴드 2세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잇따르고, 레오폴드 2세 동상에 '수치'라는 낙서와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훼손된 후 철거되는 일이 벌어졌던 거죠. 이런 걸 보면 레오폴드 2세의 만행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양심 있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은데요. 벨기에도 콩고에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이 필요해 보입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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