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새 무역장벽 'RE100'.. 이대로면 수출 30% 줄어든다
대선에서도 화두(話頭)였던 RE100을 두고 한국 대표 산업인 반도체가 딜레마에 빠졌다. RE100은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 100% 사용을 달성하자’는 글로벌 기업들의 캠페인이다. 구글·애플·나이키 등 372개의 글로벌 기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도 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 현대차그룹 등 19곳이 동참했고, 삼성전자도 참여를 준비 중이다.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글로벌 투자사와 참여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제품 공급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면 반드시 동참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KDI 정책대학원과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들이 2040년까지 RE100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반도체 수출이 30%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반도체로 먹고사는 한국에 RE100이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신 무역 장벽이 된 RE100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들은 고심하고 있다. 한국은 지리 조건과 국가 에너지 정책 등 여러 요인으로 자국 내에서 재생에너지를 100% 충당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에너지 다(多)소비 산업으로, 삼성·SK는 핵심 생산 시설을 대부분 한국에 두고 있다.
반면 RE100 참여 기업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유럽은 풍력·태양광 등 상대적으로 풍부한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데다 결정적으로 제조업 비중이 높지 않다. 게다가 그나마도 중국, 동남아 국가 등에 생산 기지를 두고 있어 부담이 적다. 실제로 사무 공간과 데이터센터가 전부인 구글과 제품 생산을 중국 현지 공장에 맡기고 있는 애플은 이미 RE100을 달성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유럽 기업들과 현지 언론들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삼성과 SK하이닉스를 향해 “빨리 참여하라”며 압박하고 있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RE100 참여 결정을 내부적으로 내리고도, 참여 선언을 계속 미루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 사업장에서 연간 2만3000GWh(기가와트시)의 전력을 소모하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기업이다. 삼성 관계자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RE100을 이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비용 산정 등 시뮬레이션 작업을 지속하는 중”이라고 했다. 내부에선 RE100에 따른 추가 비용이 수조(兆)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고객사인 애플의 압박 속에 RE100 참여를 선언한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생산량 증가로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는 등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다.
◇국내 재생에너지 7.5% 수준 불과
지난해 국내에서 생산된 신재생에너지는 총 4만3000GWh로 전체 전력 생산의 7.5% 수준에 불과하다. RE100을 달성하려면 국내에서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를 구매하거나, 재생에너지 발전 업체와 전력 거래 계약(PPA) 등을 맺어야 하는데 기업들의 수요가 쏠리면서 이 가격도 뛰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 REC는 일반 전력 대비 1kWh(킬로와트시)당 10~80원가량, PPA는 80원까지 비싼 상황”이라며 “이런 비용이 반영되면 시장에서 한국산 반도체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싼 재생에너지 조달 비용 때문에 해외에 생산 기지를 짓는 것이 이득인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정부가 재생에너지 공급을 대폭 늘리고, 재생에너지 구매에 따른 세제 혜택이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해 달라는 입장이다. 조신 연세대 교수는 “국내 환경에 제약이 큰 만큼, 해외 재생에너지 구매(PPA)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인정해주는 방안을 국제사회에 제안해 논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RE100
‘Renewable Energy(재생에너지) 100%’의 약자. 2050년까지 기업들의 사용 전력 100%를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글로벌 캠페인. 영국 비영리기구 더클라이밋그룹, CDP(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 주도 아래 구글·애플·나이키 등 372개(한국 기업 19곳 포함) 기업이 가입했다. 자발적인 민간 캠페인이지만 글로벌 투자사, 가입 기업들의 협력사에 대한 동참 요구 등이 잇따르면서 사실상 ‘신(新)무역장벽’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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