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인생' 송해 선생의 부고에 부쳐 [김재동의 나무와 숲]

김재동 2022. 6. 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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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8일 오전 당도한 부고 한 장은 우리를 슬프게 했다. ‘국민 형님’·‘국민 오래비’라 불린 ‘일요일의 남자’ 송해 선생이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평생을 본인 말 ‘딴따라’로 살아오며 한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으로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1955년 28세 나이로 창공악극단에 입단해 공연의 길을 걸었고 60년대 초반 새롭게 창설된 방송계로 진출해 대중문화의 현장을 지켜왔다.

KBS 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 최근까지 MC를 맡았던 KBS TV ‘전국노래자랑’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하나같이 장수 프로그램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분단의 역사, 실향의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기도 했다. 평생을 고향인 황해도 재령과, 그 곳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 박신자씨를 그리워했다.

그와 연관된 개인적인 기억이 있다. 2013년 5월초께다. 퇴근길 종로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 바로 앞 경로석에 그가 있었다. 양 옆으로 그를 의식한 할아버지 두 분이 말이라도 걸어볼 양 안절부절이었지만 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침묵은 잠원역에서 내가 내릴 때까지 지속됐다.

그 2~3일 전인 4월 30일, 경색된 남북관계로 인해 개성공단 잔류인원 50명 중 최후의 7명을 남기고 43명이 귀환한 그 날,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 쇼’가 취소됐다는 뉴스가 전파를 탔었다.

취소이유는 “관객 중 상당수가 실향민인데, 개성공단 철수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 상황을 앞두고, 노래하고 춤추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 쇼’ 는 지난 2011년 9월 12일 장충체육관에서 시작, 대구·전주·부산·대전·안동 등 12개 지역에서 26회의 전국 투어를 돌았고, 2012년 9월 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즌 2’ 로 새롭게 출발, 다시 대전·인천·부산·대구·경주 등 5개 지역 14회 공연을 무사히 마친 후 어버이날인 2013년 5월 8일 출발지인 서울로 재입성, 대장정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었다.

그날 그의 침묵은 피날레가 무산된 실망감, 남북관계 경색에 대한 좌절, 고향과 어머니로부터 한 발 더 멀어졌다는 상실감으로 이해됐다.

그날 그 나만의 일방적인 인연 때문에 2012년 6월 22일 방영된 KBS 2TV ‘여유만만-6.25특집 송해의 고백쇼’를 다시 보기도 했다.

그 자리서 그는 62년 전의 기억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했었다. 1950년 12월 3일의 황해도 재령엔 37~8년만의 강추위가 몰아닥쳤고 눈발이 휘날렸으며 어린 누이 동생은 툇마루 기둥 옆에서 말끄러미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눈발처럼 시리고 하얀 머릿수건을 두른 채 아들을 잡고 싶은 마음을 단속이라도 하듯 한 팔로 툇마루 기둥을 그러안고 계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동그란 눈에 슬픈 기색을 담고는 “얘야 이번엔 조심하거라”라 당부했단다. 산중의 인민군이 징치고 내려오면 하루 이틀 옆 마을로 피해있다 돌아오는게 다반사였던 터라 본인은 “별 일 있겠어요? 한 이틀 있다 올게요” 하고 집을 떠났다 했다. 그 길이 종내 이별이 될 줄도 모른채.

인민군과 맞총질 해가며 피해간 해주 바닷가에서도 그랬고, 운 좋게 얻어 탄 보급선에 몸 싣고 연평도에 정박한 미군 LST에 몸을 실었을 때도 그랬단다. 3~4일 망망대해를 지나 부산항에 내렸을 때도, 다시 무슨 줄인지도 모른 채 따라가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그는 술회했다.

통신병으로 육군본부에 배속 받아 남은 전쟁을 치르고 1953년 7월 27일 군사기밀 암호전문을 예하부대에 타전했을 때, 그리고 타전 내용이 “7월 27일 22시를 기해 모든 전투행위를 중단한다” 라는 휴전 전문임을 확인했을 때 모두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고 했다.

이틀을 기약하고 떠나 3년이 걸렸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집에 갈 수 있다고. 어머니의 동그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기대했단다. 결국 그는 8일 작고할 때까지 그 한을 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나팔꽃 인생이라 자평했었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었다가 아침이면 다시 피는 나팔꽃과 같다고 생각해서다. 이승에서 그의 나팔꽃이 다시 필 일이야 없겠지만 저승에서라도 활짝 피어나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와 행복했으면 좋겠다. 송해 선생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어본다.

/zaitung@osen.co.kr

[사진] OSEN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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