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의 상상은 계속된다
주인공 에드워드 말론은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엄청난 모험을 한 유명한 남자가 아니라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는다. 신문기자였던 그는 편집장에게 큰 사건을 맡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괴짜로 유명한 챌린저 교수를 취재하게 된다. 챌린저는 아마존 밀림 어딘가에 공룡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런던의 학계와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었다. 급기야 챌린저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원정대가 꾸려지고 말론도 일원으로 가담한다. 원정대는 천신만고 끝에 브론토사우루스를 런던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나, 포박을 끊은 공룡은 런던 시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결국, 런던 브리지를 건너다 교각이 붕괴되며 공룡은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셜록 홈스의 작가 아서 코넌 도일이 1912년에 발표한 <잃어버린 세계>의 줄거리이다. 1925년에 무성영화로 만들어졌다. 최초의 특수효과인 스톱모션 촬영으로 공룡들의 움직임과 스펙터클한 장면을 구현했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시각적 충격이었고 영화 역사상 최초의 공룡괴수영화로 기념비적 위업을 세웠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33년 영화 <킹콩>이 개봉한다. <잃어버린 세계>의 미국식 리메이크 판이다. 이야기의 주무대는 당연히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졌고, 주인공도 공룡에서 고릴라를 닮은 거대 괴수로 변경되었다. 이야기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고 <잃어버린 세계>에서 사용된 각종 공룡 모형과 스톱모션 촬영 기술이 재활용되었다. 차이점이라면 백인 여성과 괴수의 러브라인이 추가된 것과, 괴수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앤을 손에 쥐고 구름 위로 우뚝 솟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기어오르는 킹콩의 모습은, 다리가 무너지며 템스강 속으로 사라지는 공룡의 마지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여 경외롭기까지 하였다. 빌딩 꼭대기에서 복엽 전투기의 공격을 받은 킹콩은 앤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허공으로 몸을 던져 381m 아래로 떨어진다. 죽은 킹콩 옆에서 경찰이 물었다. “비행기가 킹콩을 죽인 것인가?” 옆에 있던 남자 주인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미녀가 야수를 죽인 것이다.”
성공적인 결말이었다. 런던이 파괴되는 장면 묘사에 급급하여 후반부 이야기가 허술했던 <잃어버린 세계>의 단점을 괴수와 미녀의 사랑을 첨가하여 마지막까지 여운을 남기는 훌륭한 드라마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들의 로맨스와 함께 마지막 무대로 등장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미래적이며 새로운 유토피아 뉴욕을 전세계에 충격적으로 각인시킨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거대 괴수조차 하찮은 미물로 만든 빌딩의 높이는 안테나까지 포함하여 지상 443m, 102층의 말 그대로 하늘 끝에 닿을 듯한 마천루였다.
1871년에 시카고 대화재(the Great Chicago fire)가 있었다. 약 300명이 사망하고 1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시카고 도심을 완전히 파괴한 대재앙이었다. 그러나 재건을 통해 시카고는 미국에서 가장 큰 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최초의 마천루는 이곳에서 비롯된다. 1885년 윌리엄 르바론 제니는 지상 55m 높이의 홈인슈어런스 빌딩을 건축한다. 6층 이상의 건물은 엄두를 못 냈던 당시에 그는 사람 뼈대를 응용하여 돌과 금속과 철근 구조로 된 고층 건물을 세운 것이다. 현대식 승강기를 개발한 엘리샤오티스의 협력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후, 마천루 건설은 뉴욕으로 확산된다. 1880년에서 1890년대까지 1차 붐이 일어나고 1900년에서 1910년대까지 2차 붐을 이루면서 1920년대 말에는 2479개의 마천루가 건설된다. 하여 20년대는 ‘미국적 성취의 시대’라 명명되었고 비로소 유럽식 건축을 벗어나 미국 고유의 마천루 양식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즐비한 마천루가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은 신세계 미국의 얼굴이었다.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는 뉴욕에서 미래의 희망찬 상상력을 발견했고, 1914년에 ‘미래주의 건축 선언’을 하며 ‘새로운 도시’(Citta Nuova)를 위한 건물 설계도를 발표한다. 그가 상상한 미래 도시는 외부로 노출된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를 기반으로 다층 복합 건물이 하나로 통합되는 거대 도시였다. 그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믿었다. 그것은 낙후된 조국을 뉴욕과 같이 혁명적이고 미래적인 시공간으로 순간이동시켜줄 것 같았고, 그것은 르네상스의 찬란한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의 공통된 열망이었다. 그러나 산텔리아는 자신의 상상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전사한다. 지금의 대형 쇼핑몰이나 기차역, 공항 등의 거대 복합 건물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묘사된 타이렐 사의 건물도 그의 건축 설계도를 참고했다.
1924년에 한 독일인이 뉴욕에 도착한다. 그는 빈 공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다 영화 제작으로 전향한 이였다. 그는 입국 수속이 늦어지며 하룻밤 동안 배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의 눈앞으로 뉴욕의 마천루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는 넋을 잃고 응시하다 이런 기록을 남긴다.
“건물들은 번쩍번쩍 빛나고 매우 가벼운, 곧게 선 휘장처럼 보였다. 눈부시고, 정신을 빼앗고, 최면을 걸려고 깜깜한 하늘에 떠 있는, 화려한 배경막처럼 보였다. 뉴욕의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축소 모형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화에 2026년의 미래 도시를 묘사하는 데 활용한다. 디스토피아 에스에프(SF)영화의 시초이자 원형으로 영화 역사상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메트로폴리스>(1927)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영화는 독일인 프리츠 랑이 뉴욕에서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놓은 것이다. 왠지 모를 불안한 존재로서의 마천루, 그것은 희망을 품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였다. 프리츠 랑은 성경의 바벨탑, 예수와 마리아, 노르웨이 신화에 등장하는 사후세계의 여왕 헬(Hel)의 상징을 바탕으로 극소수 귀족과 다수 노동자들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100년 후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불길한 예언이었다.
<메트로폴리스>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오마주되거나 리메이크된다. 안드로이드 마리아는 <스타워즈>의 C3PO의 디자인으로,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퀸이 1984년에 발표한 ‘라디오 가 가’의 뮤직비디오로, 1949년에는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가 리메이크하고 2001년에는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와 <은하철도 999>의 린 타로가 극장판 풀프레임 애니메이션으로 부활시켰다.
이처럼 뉴욕의 마천루는 산텔리아와 프리츠 랑에게 시각적 영감으로 미래를 상상하게 하였으나 두 사람의 예감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지상 123층, 555m의 높이다. 우리나라에서 100층을 넘은 최초의 빌딩이며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마천루이다. 오래전부터 미래주의자처럼 느껴보고 싶은 욕구가 있어, 어느 날 이 거대한 빌딩 속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들뜬 기대감인지 예민한 불안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나는 다만 압도될 뿐이었다. 그것이 산텔리아를 좇는 것인지, 프리츠 랑을 좇는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그것은 분명 창작의 영감이기도 할 것이고 미술교육의 바람직한 도입부이기도 할 것이다.
미술교사로서 20여년의 시간을 보냈다. 부족한 교사였으나, 나름 미술교육의 지향은 있었다. 산텔리아와 프리츠 랑에서 보듯이, 첫눈에 보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찰하여 시지각적 호기심을 일으키고, 그것이 지적 탐구로 이어져 그림이든 조각이든 영상이든 가리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 창의적 발상이란 시각적 충격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동안 아이들에게 잘 전달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글·그림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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