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필름영화, 도달하지 못한 여성감독의 꿈에 대한 헌사

한겨레 2022. 6. 3.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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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ㅣ오마주
여성 영화인 홍은원..그의 영화 '여판사' 향한 오마주
신수원 감독 고군분투 제작..배우 이정은과 함께 완성
신수원 감독의 데뷔작 <레인보우>와 이어지는 여성 감독에 관한 영화 <오마주>.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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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선생님, 환갑은커녕 50도 못 돼서 나에게는 발 들여놓을 한 뼘의 공간도 없어진 영화 현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노래를 잊은 카나리아는 많은 친구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노래마저 영영 잊었어요. 아, 가만히 있어봐요.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네요. 아직은 확실치가 않지만 그 소리는 내 딸아이의 목소리 같아요. 엄마가 잊은 노래를 어쩌면 나의 딸아이가 찾아줄지도 모르겠네요. 그 애가 엄마 닮아서 영화라면 미치도록 좋아하거든요.”

2001년에 출간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시네아스트 홍은원>에 수록되어 있는 유고(遺稿) ‘여류 감독의 비애’에서 홍은원 감독은 이렇게 썼다. 1976년 1월, 월간지 <세대>에 기고한 글이었다.

소문만 무성했던 영화 ‘여판사’

그는 한국 영화사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이자 두번째 여성 감독이었고, 여성 스태프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1950~60년대에 영화 현장을 누볐던 여성 영화인이었다. 1962년 <여판사>로 ‘입봉’하기 전까지 100여편의 영화에서 조감독 및 스크립터로 일했는데, 그의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어 <여판사> 개봉 당시 “조감독으로서 몇 사람의 중견 감독을 길러낸 숨은 실력이 발휘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감독 입봉은 도제식으로 이루어졌고, 영화 현장은 견고한 남성 연대가 지배하는 장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단 세편의 영화만을 연출할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작품 세계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홍은원의 데뷔작인 <여판사>의 필름이 발견된다. 순회영화상영업을 하던 영화업자가 450여편의 개인소장 필름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했는데, 그 필름 더미에서 <여판사>가 튀어나온 것이다. 1961년 서른세살의 나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한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 황윤석을 모티프로 하면서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문구로 홍보되었던 영화. 당시 2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크게 흥행했던 영화.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주제로 다루었고 “우리 개인의 일시적인 고통이나 난관보다는 많은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엘리트 ‘직업여성’이 등장하는 영화. 소문만 무성했던 바로 그 영화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필름의 일부분이 사라졌고 사운드가 유실된 부분도 있어 영화를 온전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2021)는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김지완(이정은)은 중년의 여성 감독이다. 세번째 영화인 <유령인간> 역시 흥행에 참패하고 자기 자신이 마치 ‘유령인간’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지완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한국의 두번째 여성 감독 홍재원의 <여판사> 필름이 발굴되었는데, 사운드가 사라진 부분에 새롭게 소리를 입혀줄 연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 일을 맡긴 했는데, 이 작업이 또 만만하지가 않다. 영화 전작이 아닌 필름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다가, 시나리오도 없고, 홍재원뿐만 아니라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이다. 지완은 영화를 복원하기 위해 홍재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조금씩 그의 삶에 빠져든다. 언제나 다음을 꿈꿨지만 ‘여성 감독’을 옭아매고 있었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끝내 ‘네번째’에 도달하지 못했던 홍재원의 모습에서 지완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본다.

<여판사>의 프린트를 찾아헤매던 지완은 지방의 한 단관극장에서 잘려나간 필름의 일부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언제 상영했는지도 알 수 없는 <벤허>(1959)의 낡은 간판이 걸려 있고 바로 그 옆에 ‘더 레인보우’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이 이름은 자연스럽게 신수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자전적인 영화인 <레인보우>(2010)를 떠올리게 한다.

<레인보우>는 “어느 날 우연히 잡게 된 카메라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레인보우>의 주인공 김지완(박현영)은 영화감독을 꿈꾸며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몇년째 ‘레인보우’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하지만 영화란 건 참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고, 삶은 더욱 그렇다. 지완은 과연 입봉할 수 있을까? 영화는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뭐야?”라는 아들의 질문에 지완은 “행인.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답할 뿐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오마주>에 이르면 지완은 이미 세편의 영화를 찍은 후다. 그리고 여전히 다음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다. 김지완이라는 캐릭터로 연결되는 두 작품은 ‘신수원의 여성 감독 연작’이라 할 만하다.

한국 영화 역사상 두번째 여성 감독이었던 홍은원의 데뷔작 <여판사>. 유튜브 갈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다시 <오마주>. 철거될 날만을 기다리며 80년대 에로영화만 불법으로 상영하고 있는 이 단관극장은 디지털 시대에 죽음을 선고받은 필름영화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공간이자 홍재원(아니 홍은원)의 잘려나간 이야기가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공간이고, 김지완(아니 신수원)의 감독으로서의 고군분투 역시 함께 새겨져 있는 공간이다. 각각의 역사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로 한 장소에 쌓여 있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영화는 스크린이란 한정적인 장소가 아닌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빛과 함께 존재하는 무언가가 된다.

<오마주>는 필름영화처럼 ‘사라진 것’과 홍재원·김지완의 다음 영화처럼 ‘도달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한다. 낡은 극장으로 떨어지는 햇볕에 비춰 보는 필름 조각이 영화가 되고, 그 조각을 이어서 영사하면 하얀 이불보도 스크린이 되는 것처럼, 삶 속에서 영화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꿈꾸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영화는 여자 홍은원, 영화인 홍은원에 대한 헌사(오마주)이자, 영화적인 것의 원형으로서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돌고 있는 필름영화에 대한 헌사가 된다. 그리고 이 헌사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영화적인 얼굴을 보여준 배우 이정은과 함께 완성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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