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27화)[연재 소설]

에린 2022. 6. 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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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유리창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뛰어갔다. 아카시는 커피를 내리며 세라와 여자가 앉은 테이블 쪽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커피잔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

세라는 채 상무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사카의 한 재래시장, 그 시장 안의 작은 화장품 가게, 이곳에서 같은 시간에 스쳐 지나갈 우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놀랄 뿐이었다. 채 상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언제 온 건가?”

채 상무의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세라는 채 상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돌렸다. 채상무의 눈썰미는 회사에서도 알아줬었다. 색조의 미세한 차이도 잡아내는 실력은 시제품을 선보일 때마다 매번 심장을 조리게 했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흔들리는 눈빛만 봐도 알아볼 거라 여겼다.

“3년 전요. 일본어 연수 왔었어요.”

세라가 말했다.

“연수? 그럼 요시메 상 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채 상무는 세라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세라는 그녀가 자신을 면밀하게 살피며 뭔가를 찾아내려 한다고 느꼈다.

“제가 사는 곳이 여기 게스트하우스예요. 시장 골목이니 웬만한 상인들은 알고 지내요.”

“상무님은 요시메 상을 어떻게 아시는지, 혹시…. 발효 추출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유 팀장도 알다시피 좋은 원료 찾는 건 우리의 일 아닌가. 아까 아들이란 사람이 한발 늦었다고 하던데, 그럼 유 팀장이 계약했다는 건가?”

채 상무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네. 요시메 상과 함께 일하기로 했어요.”

“계약조건은 우리가 훨씬 좋을 텐데, 알 수가 없군.”

그녀는 미간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요시메 상이 유 팀장을 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러나 방심하지 마. 비즈니스에서는 영원한 내 편은 없거든.”

채 상무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세라의 신경을 자극했다.

“저도 잘 알아요. 가온에서 우리한테 증정하기로 한 팔레트 샘플을 경쟁업체에 먼저 넘겼던 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세라가 의도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건강은 괜찮나?”

세라는 회사에서 하혈했던 일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네. 아무 문제 없어요.”

“그것 또한 다행이네.”

세라는 채 상무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식적으로 경계했다.


그날 밤 세라는 옥상에 있는 공용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서울과 다를 게 없었던 하늘은 이제 완벽한 이국의 것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달을 가렸다. 달을 가려도 주위는 어두워지지 않았다. 옥상에 켜놓은 작은 전구들과 주위 건물의 옥탑에서 흘러내리는 네온의 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두운 하늘에 하얀 손등이 쭈글쭈글 빛났다. 순간 거죽이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세라는 깜짝 놀라 상체를 곧게 세워 손등을 매만졌다.

요시메와 계약을 한 후 캡틴과 아카시는 자신들의 일처럼 좋아했다. 도경은 공모전 준비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다 돼서야 카페에 들르곤 했다.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아카시와 하루마는 케이크와 음료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세라가 카페로 내려와 일손을 거들려고 했다. 캡틴은 마다하며 케이크가 있는 테이블 중앙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도경은 언제 와요?”

아카시가 시계를 보고 캡틴에게 물었다.

“조금 늦는다고 했는데, 곧 오겠지. 먼저 시작합시다.”

캡틴이 마른안주를 챙겨 테이블로 왔다.

“자, 그럼 사업가로 첫걸음을 내딛는 세라 씨를 축하합시다!”

세라는 카페 문소리가 날 때마다 쳐다봤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멈췄지만, 잔바람은 여전히 카페 문틈 사이로 들이쳤다. 도경은 축하 자리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세라는 화장수 샘플을 만들어 테스트에 들어갔다. 그럴수록 요시메의 화장품 가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장 사람들에게 샘플을 나눠주고 반응을 살폈다. 몇몇 사람들은 샘플을 더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지만,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다.

세라는 시장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 대신 샘플로 준 화장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기다릴 수가 없어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먼저 들른 곳은 과일꼬치 집이었다. 과일꼬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정신없이 꼬치를 내어주는 주인 아주머니와 계속 과일을 꼬치에 끼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화장수 얘기를 꺼내는 게 면구스러웠다. 다른 손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세라는 뒤돌아 나왔다. 속옷 가게는 잠시 외출 중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고 와규집 사장은 고기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생선 가게로 갔다. 어제 찾아갔을 때 주인 여자는 내일 와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주인 여자는 가끔 어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가게에 나왔다. 핸드폰으로 만화 동영상을 틀어 놓으면 아들은 떼쓰지 않고 조용했다. 선풍기에 매단 길게 자른 종이가 생선 위를 돌며 파리를 쫓고 있었다.

세라는 생선 가게에 들어가려 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도경이 주인 여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도경은 어제 축하 파티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었다. 자신의 공모전을 위해서라면 여자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사진 찍는 게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라는 갈 곳 잃고 서성이다 요시메 가게로 향했다.

“니코리, 왜 이렇게 기운이 없니?”

요시메가 세라에게 말했다.

“화장수 샘플을 준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말이 없어요.”

“그럼 직접 물어봐야지.”

요시메가 엉킨 실타래를 풀며 말했다.

“그게….”

세라는 한숨을 쉬었다.

요시메는 실타래가 곧게 풀리자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다시 감았다. 공같이 둥글게 말린 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여편네들이 샘플 가져갈 때는 몇 개씩 가져가고 아무 얘기 없다는 거냐? 안 되겠다. 앞장서 봐.”

요시메는 갑자기 격양된 목소리로 나무랐다. 세라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일어서는 요시메를 겨우 달랬다.

집으로 가는 길에 카페에 앉아 있는 도경이 보였다. 생선 가게에서 주인 여자와 머리를 맞대고 있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세라가 옆에 앉은 줄도 모르고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만 계속 돌려봤다.

“이제 생선도 찍나 봐요.”

세라가 말했다.

도경은 급하게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뭡니까, 사람 놀라게. 그런데 생선을 찍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낮에 생선 가게에 있는 걸 봤어요. 거기서도 정신없이 찍던데요.”

“그건, 생선이 아니라….”

도경은 말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라가 시장을 돌면서 몇몇 가게 앞에서 기웃거리는 걸 보았었다. 그러고는 생선 가게 주인과 이야기하다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도경은 세라가 가게를 돌아다니는 이유가 궁금했다.

세라는 생선이 아니라며 말을 더 잇지 못하는 도경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세라와 도경은 동시에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세라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 지내니?”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자 세라는 잠깐 움직일 수 없었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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