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지루함 모르는 역동감

김용래 2022. 6. 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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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성공적 초연..예술의전당서 5일까지
첫공연 주역 서선영, 고난도 테크닉에 호소력 넘치는 가창..조역들도 한몫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오렌지색과 푸른색 열매들이 달린 하얀 나무가 무대 중앙에 서 있다. 이 빛깔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두 진영을 상징한다. 억압하는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이다.

이탈리아 연출가 파비오 체레사는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에서 '중세 프랑스와 시칠리아 사이의 적대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을 지웠다. 특정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대신 이 세상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치환한 것이다.

특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위치가 바뀔 뿐, 폭력의 역사는 지속된다는 위험도 암시했다. 지난 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단장 박형식)이 국내 초연으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체레사는 과거 국립오페라단에서 연출한 바로크 오페라 '오를란도 핀토 파초'에서와 유사하게 동화적 상상력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웠다. 무대 위에서 주역 가수가 혼자 아리아를 노래할 때도 언제나 곁에서 이와 관련된 상황이나 추상적 움직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13세기 시칠리아의 '만종 대학살'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실제 역사 속 인물 갈등을 연출가와 무대디자이너는 시종 밝은 색감으로 이끌어갔다.

2막부터 4막까지는 나무, 범선, 섬, 행성 등의 이미지와 함께 경계와 적대를 상징했던 의상 색상의 대비가 서곡과 5막에서는 모두 순백으로 바뀌어 '피아의 구분이 없는 평화로운 이상향'을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가족관계, 민족, 이데올로기 등의 굴레를 상징하며 인물을 옥죄는 긴 옷자락, 천사의 검은 날개, 얼굴이 사라져버린 죽은 이들 등 현대 연극이나 오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이미지들이 많았지만, 그것이 적용된 맥락들은 상당히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협력연출 조은비의 참여로 연출 콘셉트에 따른 자막 수정이 이루어져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아로 자란 시칠리아의 열혈 독립투사 아리고(테너 강요셉 분)와 프랑스인들에게 오빠를 잃고 복수심에 찬 공녀 엘레나(소프라노 서선영 분), 극의 진행 중에 아리고의 아버지임이 밝혀지는 프랑스인 총독 몽포르테(바리톤 양준모 분), 만종 대학살을 주도하는 나이 든 독립투사 프로치다(베이스 최웅조 분)의 사랑과 갈등, 애증 관계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가장 열렬한 관객의 갈채를 끌어낸 주인공은 서선영이었다. 유명한 5막 아리아 '벗들이여, 고맙습니다!'에서 보여준 고난도 테크닉뿐만 아니라 4막 감옥 장면의 강요셉과 함께 한 이중창에서도 호소력 있는 가창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요셉 역시 갑자기 알게 된 아버지와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찢기는 심경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다만 고음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부에서 위태롭게 보인 점은 안타까웠다.

양준모는 권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을 잘 맞는 옷처럼 소화했고, 혈육의 정 앞에서 약한 면을 드러내는 권력자의 모습을 깊이 있는 가창으로 보여줬다. 최웅조는 결기 있는 민족지도자 면모를 드러내는 가창을 통해 극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고조시켰다. 작은 배역들이 유난히 많은 이 오페라의 이번 공연에서는 조역들까지도 모두 역에 걸맞은 가창과 연기를 선사했다.

지휘자 홍석원은 70명이 넘는 코리아쿱오케스트라를 놀라울 정도의 치밀함과 박력으로 이끌어 압도적인 사운드를 들려줬다. 도입부와 1막, 2막에서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충분히 유연하지 못한 호흡을 보이기도 했지만, 첫 번째 휴식 후 3막부터는 뒤로 갈수록 밀도 있는 연주를 들려주며 관객들의 만족감을 이끌어냈다. 특히 시칠리아인들의 총독 시해 기도가 좌절되는 폭발적인 3막 피날레에서 음악적 몰입도는 절정에 달했다.

국립오페라단에서는 '나부코', '아틸라'에 이어 이번에도 합창의 비중이 각별히 큰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특히 7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노이오페라코러스(단장 박용규)는 난해한 부분이 많고 리듬이 복잡한 합창음악을 놀랄 만큼 정밀하게 재현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적으로 두 배가량 많은 이 작품의 합창은 여기저기 작은 규모의 무리로 나뉘어 노래를 나눠 부르는 부분도 많아 음악적 긴장도 또한 크다.

여기에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몸을 던져 연기하는 합창단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 진영 의상의 색상을 대비시킨 것은 좋았으나 색감이 좀 더 세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소프라노 김성은, 테너 국윤종 등이 주역을 맡은 다른 팀과 격일로 공연한다. 5일까지.

rosina@chol.com

오페라 '시칠리아섬의 저녁기도' [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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