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미술관이란 어떤 곳인가
나희덕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문화적 위용을 보여주던 장소가
다양한 주제와 규모로 분화되어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 확산
미술관의 공적 역할 재정의돼야
현대문명의 자화상을 포착해낸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와 질문들
지난주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 ‘데이터의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긴 영상 작품이 많아 한두 번은 더 가야 할 것 같다. 그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성 미디어 작가로, 뛰어난 비평가이자 저술가이기도 하다. ‘진실의 색’ ‘스크린의 추방자들’ ‘면세 미술 :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등이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동시대 예술에 대한 그의 성찰이 주목 받고 있다. ‘데이터의 바다’ 전은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라고 한다. 책으로만 접했던 그의 생각이 영상 작품으로는 어떻게 구현됐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섰다.
지하에서 열리고 있는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를 보려면 로비에 몇 겹으로 길게 늘어선 관람객의 행렬을 지나치게 된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을 보러 온 그분들은 적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세 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기증된 작품 1488점 중에서 한국 근대 회화 대표작 50여 점을 선보이는데, 여기에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천경자·이상범 등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말로만 듣던 유명한 작품을 직접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람객의 만족도가 높다. 대기업가의 수장고에 있던 작품들이 기증되어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전시에만 유독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이들에게 미술을 감상하는 일이란 무엇이며 미술관이란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된다.
원래 ‘뮤지엄(museum)’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고전 연구기관인 ‘무세이온(mouseion)’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박물관의 역사는 3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왕실은 예술 작품이나 과학 자료는 물론, 각 나라에서 수집한 전리품들을 보관하거나 전시했고, 유럽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대국가의 탄생기에는 박물관이 민족 이데올로기의 재현 공간이 되면서 대중에 대한 교육적 기능을 담당했다.
20세기 이후에는 장르나 개인별로 분화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미술관이 생겨나고, 전시 공간만이 아니라 사용자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유럽의 2200개 이상의 기관이 참여하는 ‘유로피아나 프로젝트’는 갤러리, 도서관, 아카이브, 박물관 등을 아우르는 디지털 플랫폼으로서 세계의 문화유산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한다. 디지털 시대에 국경을 넘어선 미래형 뮤지엄의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할 뿐 아니라, 동시대의 담론을 생산하면서 지식과 예술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마침,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중에 동시대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되묻는 ‘면세 미술’(2015) ‘경호원들’(2012)이 있다. 작가는 ‘미술관은 전쟁터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미술관을 둘러싼 자본과 제도, 권력과 시선 등에 대해 비판적 메시지를 전한다. 미술관이 지구 내전 시대에는 더 이상 예술작품을 소장·전시하는 평화로운 장소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상징적 장소로서 미술관은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그 역할과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면세 미술’은 히토 슈타이얼의 작품 제목이자 강연 원고이기도 한데, 이 글에는 미술관의 두 가지 사례가 나온다. 첫째는, 시리아의 영부인이 주도한 국립박물관 설계의 국제 공모가 거리 시위 등 정치적 이유로 무산된 경우다. 둘째는, 터키 디야르바키르의 시립미술관이 200명이 넘는 야지디족 난민들에게 사무실과 전시공간 전체를 비상보호소로 내준 경우다. 사뭇 대조적이지만, 미술관의 건립과 운영에 정치나 전쟁이 미치는 영향을 잘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히토 슈타이얼은 “동시대 미술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인터넷, 비엔날레, 아트 페어, 동시다발적인 평행 역사들, 소득 불평등의 증가가 더해져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목록에 “부의 광범위한 재분배 원인 중 하나인 비대칭적 전쟁, 부동산 투기, 탈세, 돈세탁, 금융시장 규제 완화”를 추가한다.
그러면서 국경이나 주권을 넘어서거나 우회하는 새로운 물리적 공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제네바, 홍콩,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모나코 등 자유항에 열려 있는 미술품 수장고다. 이 면세구역의 수장고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품이 보관돼 있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들은 세금(duty) 한 푼 내지 않고 초국적 운송망을 통해 미술품을 은밀하게 보관하고 거래한다. 과거 미술관이 국가의 역사와 문화적 위용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미술관은 때로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사적 공간이 돼 가는 것이다. 이 사례들을 통해 작가는 국경과 민족의 경계가 유동화되고 디지털 문화가 확산된 시대에 미술관의 공적 역할이나 의무(duty)도 재정의돼야 한다고 말한다.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하느라 정작 ‘미션 완료:벨란시지’ ‘깨진 창문들의 도시’ ‘소셜심’ ‘야성적 충동’ ‘이것이 미래다’ ‘안 보여주기’ ‘유동성 주식회사’ 등 중요한 작품들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데이터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현대문명의 자화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를 더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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