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신탁 풀면서 더 지혜로워진 그리스인들[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2022. 6. 3. 03:03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얻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든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이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썼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지혜에 대한 사랑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관습도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에서나 공무에서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탁에 조회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의 계시에 의지했을까? 그들이 신탁에 의지한 것은 지혜의 부족 탓일까, 지혜로움 때문일까? 》
애매모호한 신의 계시
신탁의 장소는 그리스 세계 곳곳에 있었지만 델피의 신탁소가 가장 유명했다. 이 신탁소가 있던 아폴론 신전 주변은 지금도 신비한 기운이 가득하다. 우람한 파르나소스산에 둘러싸여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곳이다. 올리브 나무들이 빼곡한 계곡은 멀리 푸른 바다로 이어진다. 고민을 안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무녀 피티아를 통해서 아폴론 신의 예언을 들었다. 신탁 의식의 첫 단계는 무녀가 접신 상태에 빠져드는 일이었다. 그녀가 앉은 세 발 의자 아래 갈라진 땅의 틈새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이 연기에 취해 접신 상태에 빠진 무녀가 신탁을 내렸다.
사람들은 온갖 문제를 가지고 신탁소를 찾았다. 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지 않나? 지금 하는 일을 접어야 할까, 계속할까? 이런 개인적인 일들뿐만 아니라 전쟁처럼 한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도 신탁의 대상이었다. 물론 신탁에서 자세한 대답을 얻으려면 복채를 많이 준비해야 했다. 재물을 적게 들고 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예’와 ‘아니요’뿐이었다. 지금도 델피 유적지에 가면 신탁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바친 보물들을 쌓아두던 건물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온갖 문제를 가지고 신탁소를 찾았다. 내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지 않나? 지금 하는 일을 접어야 할까, 계속할까? 이런 개인적인 일들뿐만 아니라 전쟁처럼 한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도 신탁의 대상이었다. 물론 신탁에서 자세한 대답을 얻으려면 복채를 많이 준비해야 했다. 재물을 적게 들고 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예’와 ‘아니요’뿐이었다. 지금도 델피 유적지에 가면 신탁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바친 보물들을 쌓아두던 건물의 옛 모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신탁의 말이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신탁은 ‘오늘의 운세’처럼 모호했기 때문이다. 연기에 취한 무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고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제관들이 이 말을 사람들에게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풀어낸 말조차 모호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풀려면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지혜를 짜내야 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치고 얻은 신의 계시도 소용이 없었다. 속단이나 아전인수 격 해석으로 신탁을 마음대로 해석한 자들은 불행과 자멸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큰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크로이소스(기원전 6세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와 선린 관계에 있던 리디아의 왕이었다. 그는 가장 영험한 신탁소를 찾기 위해 일곱 곳의 신탁소에 사절들을 보낸 ‘영리한’ 사람이었다. 신탁이 내리는 당일 왕이 한 일을 알아맞히는 신탁소를 찾아내는 것이 사절의 임무였는데, 이런 실험 결과 델피의 신탁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크로이소스가 양과 거북을 함께 삶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델피 신탁의 신령함을 확인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다시 신탁에 조회했다.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면 큰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신탁에 고무된 크로이소스는 과감히 강을 건너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했다. 그리고 신탁을 실행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켰다! 훗날 겨우 목숨을 건진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 왕의 호의를 얻어 델피에 사절을 보내 신탁의 잘못을 불평하자 무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가 잘 숙고하길 바랐다면 사절을 다시 보내, 신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 자신의 제국인지 아니면 키루스의 제국인지 더 물어봤어야지.”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공격을 받은 아테네인들의 경우가 그랬다. 페르시아의 침략군 앞에서 위기에 몰린 아테네인들은 대책을 고민하다가 델피의 신탁에 조회했다. “나무 성벽이 그대들을 구할 것이다.” 신탁은 역시 모호했다. ‘나무 성벽을 쌓으라?’ 대체 무슨 뜻일까? 아테네인들은 함께 모여 숙고를 거듭했다. 옛날 아크로폴리스가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거기서 싸우라는 말인가? 아니, ‘나무 성벽’은 군선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군선들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배를 타고 도망쳐야 할까, 싸워야 할까? 숙고와 논쟁 끝에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나무 성벽을 쌓듯이 살라미스해협에 군선들을 배치해서 페르시아의 함대를 무찔렀다. 그리스 역사를 바꾼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신의 예언과 인간의 지혜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었다.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지혜
신탁에 의지한 그리스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의 지혜를 구한 까닭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다. 신탁의 뜻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인들은 더 지혜로워졌다. 신적인 계시의 뜻을 묻고 따지는 과정은 인간적 지혜를 갈고닦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신탁의 관습은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지혜’,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혼자 판단하기 어려워 조언자를 찾아야 할 때가 온다. 용하기로 소문난 점쟁이들의 말이 귀를 사로잡는다. 그런 신통한 사람들이라도 찾아가 답답한 사정을 터놓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족집게 같은 조언도 어리석음은 구제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욕심에 눈이 먼 자는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를 파기 때문이다. 두 번 묻지 않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패망을 초래한 크로이소스처럼. 그는 영리했으나 지혜가 없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수많은 ‘크로이소스들’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함을 삼가라.” 이 두 경구가 왜 거기 새겨져 있었을지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함을 삼가라”는 신탁에 앞서는 신탁, ‘최고의 신탁’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지나침 없는 행동의 지혜를 찾는 일이었으니까.
‘최고의 신탁’이 신탁소를 찾은 옛 사람들이나 철학자들만을 위한 것일까? 자연 지배를 향한 욕망과 만족을 모르는 소비의 욕망이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세상에서 그 신탁은 더 엄중하게 다가온다. 우리도 이 신탁을 풀이하면서 더 지혜로워질 수는 없을까?
“큰 나라가 멸망할 것이다”
크로이소스(기원전 6세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와 선린 관계에 있던 리디아의 왕이었다. 그는 가장 영험한 신탁소를 찾기 위해 일곱 곳의 신탁소에 사절들을 보낸 ‘영리한’ 사람이었다. 신탁이 내리는 당일 왕이 한 일을 알아맞히는 신탁소를 찾아내는 것이 사절의 임무였는데, 이런 실험 결과 델피의 신탁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크로이소스가 양과 거북을 함께 삶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델피 신탁의 신령함을 확인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다시 신탁에 조회했다.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면 큰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신탁에 고무된 크로이소스는 과감히 강을 건너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했다. 그리고 신탁을 실행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켰다! 훗날 겨우 목숨을 건진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 왕의 호의를 얻어 델피에 사절을 보내 신탁의 잘못을 불평하자 무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가 잘 숙고하길 바랐다면 사절을 다시 보내, 신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 자신의 제국인지 아니면 키루스의 제국인지 더 물어봤어야지.”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공격을 받은 아테네인들의 경우가 그랬다. 페르시아의 침략군 앞에서 위기에 몰린 아테네인들은 대책을 고민하다가 델피의 신탁에 조회했다. “나무 성벽이 그대들을 구할 것이다.” 신탁은 역시 모호했다. ‘나무 성벽을 쌓으라?’ 대체 무슨 뜻일까? 아테네인들은 함께 모여 숙고를 거듭했다. 옛날 아크로폴리스가 가시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거기서 싸우라는 말인가? 아니, ‘나무 성벽’은 군선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군선들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배를 타고 도망쳐야 할까, 싸워야 할까? 숙고와 논쟁 끝에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나무 성벽을 쌓듯이 살라미스해협에 군선들을 배치해서 페르시아의 함대를 무찔렀다. 그리스 역사를 바꾼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신의 예언과 인간의 지혜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었다.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지혜
신탁에 의지한 그리스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의 지혜를 구한 까닭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다. 신탁의 뜻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인들은 더 지혜로워졌다. 신적인 계시의 뜻을 묻고 따지는 과정은 인간적 지혜를 갈고닦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신탁의 관습은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지혜’,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혼자 판단하기 어려워 조언자를 찾아야 할 때가 온다. 용하기로 소문난 점쟁이들의 말이 귀를 사로잡는다. 그런 신통한 사람들이라도 찾아가 답답한 사정을 터놓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족집게 같은 조언도 어리석음은 구제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욕심에 눈이 먼 자는 스스로 파멸의 구덩이를 파기 때문이다. 두 번 묻지 않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패망을 초래한 크로이소스처럼. 그는 영리했으나 지혜가 없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수많은 ‘크로이소스들’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함을 삼가라.” 이 두 경구가 왜 거기 새겨져 있었을지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함을 삼가라”는 신탁에 앞서는 신탁, ‘최고의 신탁’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지나침 없는 행동의 지혜를 찾는 일이었으니까.
‘최고의 신탁’이 신탁소를 찾은 옛 사람들이나 철학자들만을 위한 것일까? 자연 지배를 향한 욕망과 만족을 모르는 소비의 욕망이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세상에서 그 신탁은 더 엄중하게 다가온다. 우리도 이 신탁을 풀이하면서 더 지혜로워질 수는 없을까?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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