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부케를 든 남자

백수진 기자 2022. 6.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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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결혼식에 다녀왔다. 바람이 세게 불지만 쾌청했던 5월의 야외 결혼식이었다. 여느 평범한 결혼처럼 주례와 축가, 사진 촬영이 차례로 이어졌다. 사진사가 “부케 받을 친구분 나와달라”고 하자 신부 측 하객 무리에서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성별만 남자인 신부의 절친한 친구였다. 신부가 부케를 던지자 유달리 큰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고, 부케를 받은 남자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서서 사이좋게 사진까지 찍었다.

별것 아닌 듯 보여도 성별이 뒤바뀌는 순간, 생각지 못했던 고정관념을 알아차리게 된다. 요즘은 청첩장을 반반 나눠 신랑·신부 이름 순서를 번갈아 쓰거나, 신부가 대기실에 갇혀 있지 않고 식장 앞에서 하객을 맞이하는 등 색다른 결혼식도 늘고 있다. 신랑과 아버지가 함께 입장하던 결혼식도 잊을 수 없다. 신랑과 함께 웨딩 로드를 걸어와 ‘잘 살아라’라고 말하듯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꽤나 멋있었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너지고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의 양성평등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가족의 생계는 주로 남성이 책임져야 한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2016년 42.1%에서 29.9%로 줄었다.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자녀에 대한 주된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고 답한 비율은 53.8%에서 17.4%로 크게 떨어졌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웃지 못할 부작용도 생긴다. 최근 대기업에 지원한 한 30대 남성은 면접에서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애는 낳을 생각이냐” 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육아휴직을 쓰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까지 차별하는 공정한(?) 세상이 온 걸까.

2018년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세계 최초로 총리 재임 중 출산휴가를 쓰고 아이를 낳았다. 총리가 출산휴가 후 의회로 복귀하자, 총리의 남편은 당분간 ‘전업주부 아빠(stay-at-home dad)’가 되겠다고 밝혔다. 총리의 딸은 생후 3개월일 때 아빠 품에 안긴 채 유엔총회 무대에 등장했다. 당시 외신들은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업주부 아빠가 될 것” ”한 나라의 지도자가 여성이고 남편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집에 있을 때, 이는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메시지가 된다”고 평가했다.

국가 지도자와 배우자의 모습은 사회의 고정관념을 뒤흔들 수 있다. 16년 동안 여성인 메르켈 총리만 보고 자라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는 독일 청소년들만 봐도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지지 여부를 떠나 “처음으로 직업이 있는 대통령 부인을 볼 수 있게 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던 2030 여성들이 있었다. 김건희 여사가 “조용한 내조”를 위해 만들었다는 샌드위치 사진이 공개됐을 때 그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대통령 부인이 입은 옷과 팬클럽에 공개한 사진이 화제가 될 때마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기는커녕 강화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는 언제쯤 ‘일하는 대통령 부인’ ‘육아하는 대통령 남편’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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