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손글씨 이벤트

차준철 논설위원 2022. 6. 2.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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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인스타그램 계정 캡처

손글씨는 정성과 노력, 인내심을 담아낸다. 연필과 펜을 꾹꾹 눌러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손글씨를 보는 사람도 그 마음을 느낀다. 2019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의 연구가 이를 입증했다. 한 유기농 식당에서 손글씨체와 활자체로 인쇄한 2개의 메뉴판을 손님 185명에게 보였더니 메뉴판별로 확연히 다른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손글씨 메뉴판을 접한 손님들이 똑같은 메뉴인데도 훨씬 더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여기며 재방문 의사를 표한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들이 손글씨체에서 식당 주인의 건강식에 대한 애정과 진심을 느낀 것으로 봤다.

컴퓨터·스마트폰이 익숙한 디지털 시대에 손글씨 쓰기는 날로 퇴화하고 있다. 자판을 치는 것보다 익히기 어려운 일이 됐다.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려 정성을 알리는 수단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쁜 손글씨 편지를 대신 써주는 사이트가 나오고 디지털 손글씨체를 뽑아주는 앱도 흔해졌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는 옛말은 진부하지만, 자신과 남들이 알아볼 수 있는 반듯한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 것은 여전한 미덕이기에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원은 부쩍 늘었다. 초등학생 손글씨 공모전도 도처에 많아졌다.

법무부가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손글씨 경품 이벤트를 열었다가 과하다는 비판이 일자 중단했다. 지난달 27일부터 한동훈 장관의 취임사 일부인 ‘정의와 상식의 법치, 미래 번영을 이끌 선진 법치행정’이라는 문구를 손글씨로 쓴 뒤 사진을 올리고 공유하면 백화점·편의점 상품권을 준다는 이벤트였다. 손글씨가 아니라 한 장관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는 이벤트라 비판받아 마땅했다. 한 장관이 지난달 검사 사직 인사글을 올렸을 때는 수백명의 검사가 낯 뜨거운 찬양이나 눈도장 찍기 댓글을 올려 빈축을 샀다.

통상적 홍보 활동이라고 우기던 법무부가 뒤늦게 잘못을 감지한 건 다행이다. 한 장관은 개인 홍보로 보일 수 있는 행사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아부의 기술>의 저자 리처드 스텐걸은 “아부는 생존을 위한 전략적 칭찬”이라 했다. 하지만 아부에도 원칙이 있다. 대놓고 하는 건 하지하책이다. 평소에, 안 보이게, 일 잘하는 게 최상의 아부다. 충성도 ‘정도껏’ 해야 통한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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