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6·4 사건이 뭐예요?"

최현준 2022. 6. 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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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냈습니다." "안 왔는데요." "다시 보냈어요." "안 왔어요."

'일국양제'가 적용되는 홍콩은 중국 영토에서 유일하게 해마다 6·4 항쟁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이었는데, 2020년부터 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행사가 금지됐다.

결국 14억명이 사는 중국 땅에서 이 사건을 추모하는 촛불은 하나도 켜지지 않게 됐다.

중국의 '6·4 항쟁'이 중국 민주화의 씨앗으로 싹을 틔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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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2019년 6월4일 저녁 홍콩 빅토리아공원에서 열린 톈안먼(천안문) 6·4 항쟁 30주년 추모집회에 참석한 홍콩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홍콩/AP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최현준 | 베이징 특파원

“보냈습니다.” “안 왔는데요.” “다시 보냈어요.” “안 왔어요.”

최근 중국판 카카오톡인 ‘웨이신’(위챗)으로 중국인 친구에게 짤막한 글을 보내려다 실패했다. 몇번을 보냈는데도, 친구는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한참 승강이하다, 친구가 보내온 자신의 스마트폰 갈무리 화면을 보고, 글이 정말로 친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글 안에 ‘톈안먼(천안문) 6·4 항쟁’과 관련된 단어가 있으면 웨이신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로만 듣던 중국의 이른바 ‘자동 검열’이었다.

뜻밖의 상황은 이어졌다. “그런데 6·4 사건이 뭐예요?”

1년 가까이 교류한 중국인 친구가 한국인인 내게 물었다. 잠시,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일까 고민했지만, 정말 모르는 듯했다. 중국에서 대학을 나온 중국인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오는 4일은 천안문 6·4 항쟁이 발생한 지 33년째 되는 날이다. 1989년 4~6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과 세계적인 민주화 흐름, 정치 지도자(후야오방)의 사망 등이 맞물려 수십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 민주화를 요구했다. 1949년 건국 이래 가장 큰 민간 저항에 부닥친 중국 당국은 무력 진압을 선택하고 4일 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군 통수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었다. 이날 사망자 수는 아직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는데, 수백명에서 수천명까지로 추산된다.

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구를 돌린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 당국은 두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이 사건을 소수 반동분자의 난동으로 모는 것이다. 인민을 향한 게 아니라 인민을 위해 총을 들었다고 설명하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사건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교육하지 않고, 신문·방송은 물론 인터넷 공간에서 이 사건을 지웠다. 30여년이 흘러 한세대가 지난 지금, 중국 당국은 이 사건을 집단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게 만드는 데 상당히 성공한 듯 보인다.

금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일국양제’가 적용되는 홍콩은 중국 영토에서 유일하게 해마다 6·4 항쟁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이었는데, 2020년부터 코로나19 사태를 이유로 행사가 금지됐다. 올해는 아예 집회 신청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2020년 7월 국가 분열·전복 등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홍콩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우려로, 어느 단체도 집회 신청을 하지 않았다. 결국 14억명이 사는 중국 땅에서 이 사건을 추모하는 촛불은 하나도 켜지지 않게 됐다.

6·4 항쟁과 비슷한 한국의 5·18 항쟁도 한때 금기어였다. 사건이 발생한 광주의 시민들끼리 기억하고 추모했지만, 정권은 이 사건을 빨갱이들의 선동에 의한 난동, ‘광주사태’로 조작했고, 다른 지역으로 진실이 퍼져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기억이 알음알음 전해져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사건이 공론화되기까지 꼭 8년이 걸렸다. 명패를 집어던진 ‘청문회 스타’ 노무현도 이 무렵 탄생했다.

중국의 ‘6·4 항쟁’이 중국 민주화의 씨앗으로 싹을 틔울 수 있을까. 현재 냉동 상태인 이 씨앗이 그대로 사라질지, 싹을 틔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우리는 100년을 보고 계획을 세우는 나라’라고 자랑한다. 이제 33년 지났다.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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