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선거가 끝나고 난 뒤

이정규 2022. 6. 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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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더불어민주당 윤호중·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비상대책위원들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총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후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정규 | 한겨레21부 취재2팀 기자

서울 여의도 당사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당직자도 기자들도 말이 없었다. 지도부가 빠져나가자 침묵으로 꽉 찼던 당사가 소란스러워졌다. “폭삭 망해버려라!” 30년간 당비를 냈다는 한 지지자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만원에서 시작해서 5만원까지 밀리지 않고 당비를 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는 2018년 6월13일 지방선거를 마친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목격한 상황이다. 1년차 기자로 한 인터넷언론사 정치부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6·1 지방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자 4년 전 경험이 떠올랐다. 선거가 끝나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그때를 반추하면 짐작되는 시나리오가 있다. 언론은 야당의 선거 패배 원인을 진단하는 보도를 쏟아낸다. 야당에서는 선거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진다. 전당대회가 열리기까지 리더십은 진공상태가 되고 계파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야당 출입기자는 어떨까. 기자도 야당 정치인의 이전투구를 중계하며 선거 후폭풍을 함께 겪는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야당은 당분간 망해갈 수밖에 없다는 자조감이 퍼져나간다. 2017년 대선에 이어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자유한국당을 출입하며 겪은 일이다.

‘그래도 냉소하지 말아야지.’ 밤늦게까지 국회의사당에서 뻗치기를 하고, 야당 정치인의 입을 쫓아다니기 바쁘던 가운데 다짐했던 말이다. 정치에 냉소를 품어서는 좋은 기사를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시간을 내서 국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니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할 만한 아이템들이 눈에 띄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2주 뒤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서울시의회의 110석 가운데 102석을 차지한 때였다. 한국당은 정당투표에서 25.2%를 얻었지만 의석수는 8석밖에 얻지 못했다.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를 개편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보수의 재건을 모색하자는 토론회도 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박정희 신화는 정치적 의미가 사라졌다.” 한 중진 정치학자는 자유한국당 의원 앞에서 쓴소리를 내뱉었다.

4년 전 상황이 공수만 교대해 재현된 지금은 어떤 움직임을 챙겨야 할까. 최근 6·1 지방선거를 맞아 ‘조례가 바꾸는 세상’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쓸 기회가 있었다. 정치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정치의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는 시민들을 만났다. 경기도 고양와이더블유시에이(YWCA)는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과 함께 ‘채식 조례 제정 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전국 7개 지자체에서 제정된 채식 조례들의 내용과 한계점을 분석했다. 지방의회 기능과 조례 제정 과정을 함께 공부하고, 6·1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 가운데 함께 조례를 만들어갈 이를 찾아보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고 이들은 채식 교육을 장려하거나, 공공기관·학교 등에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아 제대로 된 채식 조례를 만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60.2% 대 50.9%. 2018년과 올해 지방선거 투표율이다. 4년 전에 견줘 10%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다. 역대 지방선거 투표율 최저치인 2002년 지방선거(48.8%)에 이어 두번째로 낮은 투표율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정치에 대한 냉소가 싹텄으려나. 쉽게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논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 때문이다.

요즘은 정치부 기자는 아니지만 <한겨레21>에서 종종 정치 기사를 쓸 기회가 온다. 1년차에는 ‘정치를 향한 냉소’와 싸웠다면 5년차인 지금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려 한다. 한때 소음으로만 들렸던 정치인들의 말다툼에서도 더 나은 정치를 위한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길 소망해본다. 그렇게 정치를 아끼고 애정하는 시민을 만날 수 있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선거 패배 후폭풍을 겪으며 갈 길을 잃은 정치인에게 닿을 수 있다면, 선거가 끝나고 난 뒤, 조금이나마 나아갈 수 있을까.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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