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칼럼] 이중잣대의 역사적 기원

한겨레 2022. 6. 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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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칼럼]내로남불식 이중잣대로 살다 보니, 거짓과 위선의 사회가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이를 증명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비판받는 자는 속으로 웃으며 순간만 넘기려 하고, 비판자는 목소리는 크되 그 손가락 끝엔 아무 힘이 없다. 서로의 위선과 거짓을 알기 때문일까. 우리 역시 가정, 학교, 일터, 모임 등 공간마다 내로남불을 예사로 실행한다. 모두 소망하는 자유·평등·정의 사회는 언제쯤 가능할까?

강수돌 | 고려대 명예교수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아마도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말 중 하나일 터. 그런데 요즘은 이게 표준말처럼 쓰인다. 로맨스와 불륜은 개념이 다르나, 같은 행위도 주체에 따라 달리 불린다. ‘이중잣대’다. 영어로 더블 스탠더드(double standard), 독일어로 ‘도펠모랄’(Doppelmoral)이다. 전자는 일관성을, 후자는 책임성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정치를 보라. 정치인이 야당일 때는 집권 여당 인사의 부동산 투기나 부정 축재, 법인카드 남용, 무분별한 특별활동비 사용, 자녀 진학 관련 비리 등에 온갖 비판을 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네가 여당이 되면 같은 사안에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요리조리 잘도 둘러댄다. 도무지 피하지 못하면, 침묵하거나 ‘영혼 없는 사과’ 뒤로 숨는다.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곳이 검찰이다. 수사를 통해 (무)죄를 밝혀 사회질서나 정의를 세우는 게 사명이다. 수사의 기준은 법과 양심, 사실과 진실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딴판이다. 폭력이나 노동자 파업 등에는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칼을 쓴다. 무전유죄! 하지만 정치·경제적 권력자나 재벌, 기득권층의 범죄에는 무딘 칼이다. 유전무죄! 중범죄자는 무죄 내지 솜방망이 처벌로 풀어주되, 오히려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고발인은 된통 당한다.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내로남불식 이중잣대가 있다.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 잣대도 다르지만, 같은 외국인이라도 백인에겐 과잉 친절을, 유색인에겐 무관심과 멸시를 보인다. 또 일부 청년들은 보수기득권층의 비리나 불공정에는 침묵하나, 민주진보 진영의 잘못에는 곧잘 침소봉대한다. 하기야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실수나 잘못엔 관대하나 남의 실수는 작은 것도 꼬집으니.

이렇게 대다수가 내로남불식 이중잣대로 살다 보니, 거짓과 위선의 사회가 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회 인사청문회는 이를 증명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비판받는 자는 속으로 웃으며 순간만 넘기려 하고, 비판자는 목소리는 크되 그 손가락 끝엔 아무 힘이 없다. 서로의 위선과 거짓을 알기 때문일까. 우리 역시 가정, 학교, 일터, 모임 등 공간마다 내로남불을 예사로 실행한다. 그러니 모두 소망하는 자유·평등·정의 사회는 언제쯤 가능할까?

따지고 보면, 농어촌 공동체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거짓말하는 이는 당장 쫓겨나거나 멍석말이를 당하고 새로 태어났다. 그러나 도시로 갈수록 공동체보다 개인이 중시되고 사람들은 바글거리되 끈끈한 유대감이 사라진, 모래알 같은 존재가 된다. 이를 역사적으로 보면 이렇다. 17세기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제 발로 서면서부터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이 탄생한 것, 그리하여 각 개인이 스스로 공동체의 일부임을 잊고 자신의 이해관계(돈, 권력, 이익)만 추구하는 것, 설사 집단으로 뭉치더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아군-적군으로 나뉘는 것, 그러면서도 강하고 승리한 쪽을 편드는 ‘강자 동일시’ 태도로 사는 것, 바로 이런 사회적 관계들의 변화가 내로남불 즉 이중잣대의 역사적 뿌리다.

만일 이런 진단에 동의한다면, 이중잣대로 충만한 위선 사회를 어떻게 정직하고 건강한 사회로 바꿀 수 있을까? 흔히들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이 그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라 한다. 제도를 바꾸면 사회변화가 쉽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편, 북유럽에 통용되는 ‘얀테의 법칙’이란 게 있다. 여러 내용이 있지만 핵심 한가지만 꼽으면 “너 혼자만 똑똑하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 이런 태도로 상호관계를 맺으면 훨씬 원만해진다. 한마디로, 겸손의 원리를 실천하기!

하지만 이중잣대의 역사적 기원인 공동체의 해체와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일부 제도 개혁이나 개인적 태도 변화로 사회를 제대로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 소망하는 자유·평등·정의 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로남불식 이중잣대를 만든 근본 뿌리를 뽑아야 한다.

첫째, 공동체의 복원은 개인(individual)이란 말 자체가 뭔가 큰 덩어리로부터 나누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임을, 즉 개인의 전제가 공동체임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자본이 부추기는 기득권 경쟁의 허구성을 통찰하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간 유대감을 복원해야 한다. 실은, 우리가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인)로서 개별 이해관계에 따라 사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처음부터 공동체의 일부다. 이게 ‘호모 소시우스’(사회인)다. 자본의 등가교환 법칙 이전부터 누천년 존재해온 인간적 가치, 생명의 가치에 충실하면 된다.

둘째, 일상의 삶 속에서 공동체적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웃사촌’ 또는 ‘친구’ 개념이 돌파구다. ‘너 있어 나 있다’는 아프리카의 ‘우분투’ 사상도 시사적이다. 예컨대, 육아공동체, 마을공동체, 나눔공동체, 배움공동체, 독서공동체, 농사공동체, 생산공동체, 놀이공동체, 창작공동체, 촛불공동체 등을 만들어 이해관계보다 인간적 유대 중심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런 공동체 관계망에서는 내로남불식 이중잣대나 위선과 거짓이 설 자리가 없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인 관계가 충만하니까.

셋째, 아무리 공동체 개념을 재인식하고 실제로 각종 공동체를 만든다 하더라도 현실로 존재하고 위력을 떨치는 ‘자본독재’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면 모두 헛발질이다. 이익은 사유화하되 비용은 사회화하는 자본의 이중잣대가 가장 해롭다. 따라서 실질적 ‘탈자본’ 운동이 필수다. 여기서 탈자본이란 상품, 화폐, 가치, 노동, 경쟁, 이윤 등에 의해 지배되는 우리 삶의 구조를 인간성과 생태성 관점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각종 사회운동의 연대를 통한 구조 변화는 물론, 우리네 일상 의식의 변화도 요구한다. 탈자본 운동이 성숙하는 정도에 비례해 건강한 공동체 복원 역시 가속화할 것이다. 또 그에 비례해 내로남불식 이중잣대와 거짓이 사라지고 명실상부 자유·평등·정의·우애 사회가 다가올 것이다.

눈앞의 이익만 따지는 자는 이중잣대의 포로가 되지만, 공동체와 우애를 중시하면 일관성과 책임성 있는 삶의 주인공이 된다. 이권 앞에 마음이 흔들릴 땐 멸사봉공의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라.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라! 각자 ‘사회적 개인’으로 거듭날 때 내로남불식 위선도 사라진다. 우리네 삶은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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