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폭력이 될 수 있다고?..장애에 대한 통념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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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가 장애인이나 환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상식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치유 폭력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장애와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여지를 없애는 폭력이다.
저자는 다만 "의학적 치유에 반대하거나 어떤 치료법은 진짜 치유이고 또 어떤 치료법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장애와 질병에 대한 치유 자체가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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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섹스 볼란티어'(2009)에는 척수 손상이 있고 부모로부터 일상적인 돌봄을 받는 여성이 잠깐 나온다. 그녀는 생리를 중단시키기 위한 자궁절제술에 동의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이 여성은 생리가 그립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은 신체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여성들에게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경우 이 여성이 아이를 낳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자궁절제술이 불임수술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보다 편의를 위한 치료라고 생각된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중에서
치유가 장애인이나 환자에게 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상식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장애와 질병은 당연히 피하거나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장애나 질병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현상이 나타날 경우 공론장에서는 의학적 치유법이 우선적으로 거론되기 마련이다.
김은정 미국 시라큐스대 장애학 프로그램 부교수는 최근 국내에 출간한 저서에서 장애와 질병을 없애는 치유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다. 문화적 텍스트에 담긴 사회적 관념과 장애와 질병을 규정하는 의학적 기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치유가 폭력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가 역으로 정상적 신체를 규정하는 테두리를 만드는 사회적 담론으로 작동해왔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 정상적 테두리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장애와 질병으로 여겨져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폭력적으로 규정된다는 얘기다. 이런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을 위한 자리가 존재할 수 없다. 저서에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이 붙여진 이유다.
저자는 근현대 한국에서 만들어진 장애를 다룬 소설과 영화, 신문기사, 정책 문건 등을 촘촘하게 뜯어보면서 한국의 역사와 정책, 제도, 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팬지와 담쟁이’ 등의 독립영화부터 ‘심청전’ ‘백치 아다다’ ‘당신들의 천국’ ‘꽃잎’ ‘수취인불명’ 같은 유명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텍스트를 넘나들면서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장애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한국 사회가 장애와 질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고찰한다. 책은 비장애인과 건강한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날 기회를 선물한다.
타인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이 지닌 고유한 차이를 지우려는 행위를 저자는 ‘치유 폭력’이라고 명명한다. 치유 폭력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장애와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여지를 없애는 폭력이다. 둘째는 치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장애인들에게 신체적, 물리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다. 저자는 이문열의 소설 ‘아가’를 비평하면서 ‘치유라는 이름의 성폭력과 향수’라는 소제를 달았다. 장애 여성을 향한 농촌 주민들의 성폭력을 따뜻한 포용과 사랑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도 도마에 오른다.
저자는 다만 "의학적 치유에 반대하거나 어떤 치료법은 진짜 치유이고 또 어떤 치료법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장애와 질병에 대한 치유 자체가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힌다. 그의 고민은 장애인이나 환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가들이 펼치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저자 스스로가 장애여성 인권운동단체인 ‘장애여성공감’의 회원이다. 일부 활동가들은, 장애나 질병을 의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당사자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정신질환자에게는 치료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직장을 알선하거나 주거지를 마련해주는 도움도 중요하다. 치유만 강조하는 담론은 치유가 불가능한 장애인이나 환자에 대한 지원을 위축시키거나 그들을 격리하는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치유를 당연한 것이 아닌 선택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 병이 완전히 낫지 않아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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