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털이' 사건으로 바라본 집단의 특성

한겨레 2022. 6. 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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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화 <파리대왕>(1990) 스틸컷.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간밤에 식당이 ‘털렸다.’ 자정을 넘긴 어느 시점. 남자아이 4명이 무리 지어 기숙사를 빠져나온다. 학교식당에 잠입해, 대형 가스버너에 불을 댕긴다. 라면 몇봉지 끓여 먹고 어둠 짙은 산길을 더듬어 돌아온다. 아이들 표현으로 ‘식당털이’다. 간단하다. 하지만 2022년 ‘새로고침 학생회’ 법무부가 정한 생활규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동이다.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교사는 움찔한다. 본관 식당과 기숙사 사이 거리는 973m. 15분 걸린다. 어두운 새벽, 야생동물 출현이나 가스 사용 위험, 책임자 없는 상황의 방치. ‘식당털이’ 행동 속에는 현실로 변할 수 있는 아찔함이 늘 담겨 있다. 2주 전 학생회는 새벽 식당 내려가기 금지 캠페인 영상을 6분 분량으로 만들어 상영을 마쳤다. 수요일 오전, 나는 전교생을 다시 모았다. 안전과 건강 관련 교칙 위반 자제를 거듭 요청했다.

금요일 오전, 학생 간담회가 열렸다. 습관적인 위반행위로 생활규칙을 가벼이 보는 교내 문화를 중단시켜보자는 취지였다. 그 모임 직후 남학생 4명이 학교 옆 ‘우리상회’에서 일반식품 사 먹는 현장을 생활교사가 목격했다. 이 역시 법무부가 정한 먹을거리 규칙 위반이다. 학생들은 분기탱천했고, 교사들 역시 시름이 깊어졌다. 금요일에 ‘스톱회의’를 열었다. 교사와 학생 110명이 강당에 모여 앉아 각자 돌아가며 한마디씩 말을 이어갔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학생들이 한명씩 따로 한 발언으로 서로 연관성은 없다.

“규칙을 어긴 사람들이 되레 ‘넌 아직 (새벽 식당) 안 내려갔었냐?’라고 놀리며 다닙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후배들이 학교의 분위기를 읽는 눈이 없어진 게 이해 안 갑니다. 선배들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왕따 되는 문화부터 바꿔야 합니다. 소수만 노력해서는 되지 않아요.”

“공동체는 신뢰를 기반으로 유지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는 사용할 만한 신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후배들은 저에게 ‘진지 까지 말라’고 항변합니다. 그럼 어쩌자고요. 진지해져야 바뀌죠. 제발 진지해집시다. 우리 마음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규칙 때문에 짜증 난다는 얘기 많이 하죠. 그거 우리가 만든 것들이에요. 논의해서 바꿔보려고 한번도 노력해보지 않았으면서 그냥 규칙 어긴 다음 변명이나 해대다니요. 비겁해요.”

“혼자만 규칙 잘 지키면 그렇지 않은 친구들과 관계가 일그러질까 봐 불안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경각심 갖거나 지금 같은 심각한 분위기를 지속하기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느슨해지죠. 저는 한번도 규칙 어긴 적이 없었는데요,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우리를 믿으면서 항상 걱정해주시는 선생님들을 배신할 수 없어서입니다. 또 하나는 규칙으로 학교질서를 유지하려 애쓰는 법무부 친구들의 노력을 보면서 각성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 규칙에 끌려다니지 말고 신념대로 그걸 완성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비난과 질타는 자제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읍시다. 그래야 변화를 바라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죠.”

눈을 반쯤 감고 아이들 견해를 들었다. 교사가 필요한 지점이 더 있을까 싶었다. 아이들 말에 이미 모든 답이 들어 있는 것을.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이 떠오른다. 고립된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 사이에서 점점 동물적 본능을 드러내던 잭 일당에 반해 끝까지 이성을 지키고자 했던 소수파 ‘새끼돼지’와 랄프는 외친다. “규칙을 지켜 합심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하는 것, 어느 편이 낫냐?”

우리 아이들이 겪는 혼란의 실체는 ‘집단의 개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다. 위의 발언에서 보듯 개인적인 이성 판단에 별 이상은 없다. 문제는 무엇인가 스릴감 있게 규칙을 어겨보려고 애를 쓰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 학교식당은 항상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털었다’. 개인과 비교할 때 집단은 충동을 억제하는 이성, 타인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을 훨씬 결여하고 있다. 집단이 보여주는 비도덕적 이기심,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내 주장 아니다. 미국 정치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이미 1932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간파했던 집단에 관한 특성 분석이다. 2022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보라. 한국 사회의 정치공동체는 대낮에 내 ‘마음을 털어 갔다’. 뭐라 하겠나. 나도 그 집단의 일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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