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의 여담] 과학과 종교는 대치 관계인가?

한겨레 2022. 6. 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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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형의 여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래 본격화된 인간과 이 세상의 궁극적 기원을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신경전은 21세기에도 한창 진행 중이다. 사진은 찰스 다윈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지난주 옥스퍼드대학 머튼칼리지에서 열린 과학과 종교에 관한 토론회 사회를 맡았다. 정확한 주제는 ‘물리학자는 무신론자여야만 하는가 ?’였고, 토론자는 무신론자인 사이먼 손더스 와 독실한 기독교인 아르트 루이 두 사람이었다. 철학자 사이먼 손더스의 전문 연구주제는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이고, 물리학자 아르트 루이는 생물, 화학, 계산과학과 인접한 물리현상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루이는 과학과 종교의 차이를 간단한 예를 통해 보여줬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데 누군가 ‘왜 물이 끓는가?’ 물어본다고 하자. 이때 화롯불의 에너지를 언급한 다음 그 에너지가 주전자 바닥을 통해 물에 전달되고 어느 순간 상전이가 일어나서 물이 수증기로 변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차를 마시고 싶어서 내가 물을 올려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첫째는 현상의 물질적인 설명이고, 두번째는 의미와 동기에 관한 설명이다. 과학에서는 물질의 움직임에 관한 상당히 정밀한 이론적 묘사가 가능하지만, 세상사의 의미나 가치에 관한 설명을 해줄 수 없다고 루이는 강조했다. 그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 사진이 조합돼 있는 영상을 보여주며 개별 인간의 존엄성은 과학적인 기술이 불가능한 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손더스는 세상만사, 즉, 가치, 의미, 사랑까지 완전히 물질적으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가령 그는 과학을 근간에 둔 분석철학이 이미 인간 가치관을 상당 수준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져 보면, 루이의 물 끓이는 예에서도 끓이는 사람의 동기를 물질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 생체작용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데 물이 필요하고 때로는 화학물질의 효과를 활용하기 위해 차를 물에 섞어 넣기도 한다. 그런 물질이 액체에 잘 풀리게 하려고 끓이는 것이다.

물론 루이의 주장은 ‘궁극적인 이유’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령 누군가 ‘왜 살고 싶냐’고 물어보았을 때 ‘후손을 낳기 위해서’ 같은 진화론적인 답이 가능하지만, ‘왜 후손을 남기고 싶으냐’는 식으로 계속 캐물으면 점점 답하기 어려워지고 결국은 ‘그냥 그렇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론자들은 과학이론이 충분히 발달함에 따라서 끝까지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보지만, 현시점에서는 그런 이론에 대한 믿음 또한 일종의 종교라고 볼 수도 있다. 루이는 궁극적인 이유의 근간이 종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실험적인 근거를 보면 과학자는 당연히 교인일 수 있다. 미국 사회학회저널 <소시어스> 2016년 9월호에 과학자와 종교에 관한 국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여러 국적의 과학자 약 1만명을 심층 인터뷰해 그들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알아보는 조사였다. 과학자 가운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종교적’이라 대답한 사람이 상당수였다. 미국은 전체 응답자의 30%, 영국에서는 27%, 이탈리아에서는 52%가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표현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결과는 ‘과학과 종교가 대치 관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지역을 막론하고 그렇다는 답은 소수였다. 가령 미국에서는 29%, 이탈리아에서는 21%만이 그렇다고 답했고, 과학자 중 종교인 비율이 16%로 가장 적은 프랑스에서도 응답자 중 27%만이 종교와 과학을 대치 관계로 보았다.

지난주 행사에서 양쪽의 웅변이 끝난 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런 종류의 토론은 보통 답답하게 끝나버린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과를 피할 수 있는가.’ 관중들은 이것을 상당히 통쾌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토론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기 무섭게 질문이 쇄도해 토론회는 밤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는 근본적인 사고와 담화에 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 때문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사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중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며 끝없이 질문하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신앙심을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설명한 ‘실용주의’ 견해에서 접근한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즉, 종교적인 사람은 종교가 세상에 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무신론자는 종교가 해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신앙과 과학, 전통과 진보, 상징과 실용, 여러 견해 가운데 맞는 것을 결정해나가는 방법이 있을까? 근본적인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서로의 좋은 의도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해주는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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