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악마'와도 타협해야 한다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길윤형 | 국제부장
우크라이나의 벗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더러운 위선자’라고 격렬한 비난을 퍼부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알고 있듯 블라디미르 푸틴이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인류는 형용하기 힘든 ‘복잡한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무력을 통해 유럽의 현상 질서를 변경하려는 푸틴의 ‘폭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쌓아온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임에 틀림없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키이우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을 ‘참수’한 뒤 전쟁을 조기 종결하려던 푸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밤새워 초기 전황을 살피던 개전 이틀째 밤, 키이우 밤거리에 지도부를 모아놓고 “우린 여기서 우리의 독립과 국가를 지켜내고 있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던 젤렌스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이후 미국과 유럽의 군사지원을 등에 업은 우크라이나인들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4월 중순께 전장의 주 무대가 키이우 주변에서 동부 돈바스로 옮겨 가면서, 러시아군의 우세가 분명해지는 중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5월20일 동남부의 요충지 마리우폴을 “완전 제압했다”고 선언했고, 이어진 집중 공세로 동부 루한스크주를 95% 정도 손에 넣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불의한 공격’을 속 시원히 격퇴해주기 바라면서도, 복잡한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전 이후 푸틴이 노골적이고 뻔뻔한 핵 위협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전 나흘째인 27일 ‘핵억지력 부대에 특수경계태세 돌입할 것’을 명령한 뒤, 러시아 당국자들은 ‘자신들이 존립을 위협받는 상황’에 이른다면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들이 말하는 ‘존립을 위협받는 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쟁이 ‘거대한 실패’로 돌아가 러시아의 국가적 위신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푸틴의 정치적 입지가 결정적으로 위태로워질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젤렌스키가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 할수록 인류 전체가 핵전쟁에 직면할 위험성이 커지게 되는 셈인데, 이 곤란한 상황을 ‘복잡한 딜레마’라는 말 외에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5월19일 <뉴욕 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전쟁이 새롭고 복잡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며 “러시아와 전면전(all-out war)으로 뛰어드는 게 미국의 최고 국익이 아니라”고 지적한 뒤 이른바 ‘키신저-소로스 논쟁’에 불이 붙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5월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더 큰 비극을 막으려면 우크라이나가 ‘영토의 일부’를 러시아에 떼어 주고 타협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튿날 조지 소로스가 “문명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가능한 한 빨리 푸틴을 무찌르는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의 대국인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이 현실주의자 키신저,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직접 노출된 폴란드, 발트 3국 등이 소로스 편에 서면서 이 논쟁은 유럽을 가차 없이 양분하고 있다.
산란해진 마음을 다잡으려 최근 일본에서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된 오키 다케시의 <독소전>을 펴 들었다. 1941년 6월 시작돼 4년 동안 이어진 독소전은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절멸하려다 ‘호된 되치기’를 당하고 망한 전쟁이라 요약할 수 있다. 이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나치즘’(독일)과 ‘볼셰비즘’(소련)이 공존을 거부하고 상대를 지구상에서 제거하려는 ‘세계관의 전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승리의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인류, 특히 여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선 따로 옮기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악마’와도 타협해야 한다.
현재 전황을 냉정히 살펴보건대, 러시아가 2014년 3월 합병한 크림반도와 집중 공세를 퍼붓고 있는 루한스크·도네츠크를 우크라이나가 실력으로 되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기적이 일어나 이를 수복하게 된다면, 유럽에서 ‘핵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미 점령당한 독도를 일본에 넘겨주라’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3월 말 이스탄불 이후 한동안 중단돼온 평화협상을 이제 재개해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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