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지식(知識)과 지혜(知慧)

국제신문 2022. 6.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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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하거나 쌓아온 지식
그 본연의 기능 다하려면 마음 속 욕심은 내려놓고 삶의 지혜로 승화시켜야

지식과 지혜는 얼핏 같거나 비슷한 말로 인식(認識)할 수 있겠으나 아주 큰 차이의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우선 사전에서의 뜻으로 구분해 보면, 지식은 사물을 아는 마음의 작용, 익혀서 알고 있음, 인식으로 얻어진 성과이다. 지혜는 슬기, 사물의 실상을 관조하여 미혹을 끊고 정각을 얻는 힘이다.

지식은 보고 배우고 익힌 것의 단순한 퇴적물이다. 따라서 지식은 쌓아놓은 그대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를 활용 응용 사용해야 그 효용이 생긴다. 예를 들면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또 박사학위를 받고 많은 학문을 닦고 연구를 해도 그냥 두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지혜는 산지식이다. 아는 것 기술 요령 방법을 활용하여 삶의 모든 면에 접목하는 것이 바로 지혜다. ‘삶의 지식’과 ‘삶의 지혜’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따라서 ‘지식’이 그 본연의 기능과 사명을 다하려면 반드시 ‘지혜’로 심화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신념은 분별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무분별의 지혜에서 저절로 우러나야 한다. 또한 지혜는 얄팍하고 간교한 꾀가 아니라 무심의 경지, 순수의식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비우는 곳에 오묘한 진리와 방책이 있는 것이며 진공묘유의 진리 속에서 자연스러운 지혜가 생겨나는 것으로 끝이 없는 욕심과 집착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것이기에 내려놓고, 비우는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싹튼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면서 습득하거나 쌓아온 지식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사회질서에 반하는 나쁜 쪽에 사용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악행은 지혜가 아니라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치부나 입신을 위해 남을 속이고, 해치고,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지식을 악용하는 파렴치한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작금의 세태를 돌아보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지금까지 남다르게 잘 쌓아온 자신의 지식을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그런 지혜로 승화시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악용하여 자신만의 이득이나 영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적선이라는 말이 있다. 살면서 착한 일을 해서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말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적선을 실천하는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지식이란 성장 과정에서 각자 습득하거나 쌓아온 분량은 각기 다르거나 현저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 겨우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거나 옛날에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거나 아예 취학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지금은 어지간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아가 대학원이나 해외 유학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지식의 습득이나 쌓아온 지식의 다소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습득하거나 쌓아놓은 지식의 크기가 바로 지혜의 크기와 같지 않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습득하거나 쌓아온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면 지극히 바람직하겠으나 자신의 지식을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나쁜 쪽으로 사용한다면 지식의 분량이 많을수록, 지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이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악행이 되고 마는 것이다.

큰 스님의 동안거를 따라온 동자승이 물었다. “스님, 긴 겨울 동안 면벽수도 하실 건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방을 따뜻하게 해 드릴까요?” “허허 그놈, 어차피 때가 되면 입적할 몸인데 차고 따뜻한 것이 그게 뭔 대수냐?”

당장 입적하지는 않겠으나 하루를 호강하면 그 이후가 더 괴롭고 불편할 뿐이고 굳이 편안함을 찾자면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다는 큰 스님의 말씀이다. 적당한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이른바 인내야말로 사람의 그릇(크기)과 사고를 더욱 크게 한다는 깊은 지혜로부터의 가르침이다.

적당한 여건이 조성되고 각자 노력하면 지식은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남을 배려하고 조건 없이 베풀고자 하는 ‘휴머니즘’이 한데 어우러져야 만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나만의 보신을 위해 남을 속이고 간교한 술책을 부리고 이 사회를 더럽히는 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다. 사악한 패륜과 더러운 배덕은 한갓 지혜의 탈을 쓴 악마의 난무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 습득하거나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반드시 지혜로 승화시켜 슬기롭고 보람 있는 인생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지혜여 영원하라!

신한춘 부산시화물자동차운송사업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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