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존재에 정당한 이름 붙이기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2022. 6.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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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원으로 온 흉부엑스선촬영 판독지를 읽던 중이었다. 영상의학과 전문의인 내 친구는 판독지에 “31세 남성 OOO, 24세 남성 OOO에게서 유방의 음영이 관찰되니, 혹시 다른 여성의 필름과 바뀐 것인지, 아니면 트랜스젠더인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나는 이 친구가 써 준 판독지를 읽고 반가웠다. 존재를 알아준다는 느낌에.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그는 병무청에서 복역하고 있으며 내게 연락을 해온 적이 있었다. 나에게 병사용 진단서를 받아간 트랜스여성의 판정을 맡았다고 했다. 6개월 이상의 호르몬 치료로 고환이 위축되고 유방이 충분히 자랐는지를 영상 검사를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이었다. 트랜스여성의 진단서에서 낯익은 내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그는 군면제를 받기 위해 트랜스젠더도 아닌데 6개월 이상 여성호르몬을 투여받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느냐며, 하지만 자신은 병무청 군의관이니 영상검사로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CT를 찍어야 할지, 초음파를 보는 게 나을지 고민이라 했다. 위축된 고환과 성장한 유방을 함께 보려면 골반에서 목까지 몸통 전체를 커버하는 CT를 찍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방사선 노출량이 너무 많으니까. 그렇다고 안전한 초음파 검사를 하자니,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여성들이 남성 의사인 자신에게 초음파 검사받는 걸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며, 뭐가 더 낫겠느냐는 고민을 얘기했다.

그 뒤로도 친구가 CT를 찍었다는 걸 나는 안다. 진료실에서 만난 트랜스젠더들을 통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같은 CT가 아니다. 우리는 그걸 안다. 똑같은 방사선 노출량이라도, 찍으라니까 찍는 CT와 고민하며 찍는 CT는 분명히 다르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는 조합원 가족 할인제도가 있다. 조합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든 조합원을 위해 조합원 자신과 가족들의 비보험 진료비를 약간 할인해주는 제도이다. 2012년 의원을 만들 때 이 제도는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였다. 조건은 간단했다. 서로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돌보고 있을 것, 같이 살고 있는 생활·경제공동체. 서류로 증빙하지 않아도, 꼭 둘만의 관계가 아니어도 좋았다. 자신도 조합원 대안가족 할인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 많은 이들이 문의했다. 이성애 동거커플, 동성애 커플, 비혼여성 공동체, 가톨릭 수도사 공동체, 중증장애인 그룹홈 등 다양한 관계들이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고 있었다.

2년 전 안타깝게도 이 제도는 축소되었다.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받아야 하는 정기 복지부 감사를 맞아 ‘법적 가족이 아닌 이들에 대한 할인제도는 환자 유인 알선의 불법행위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단호한 경고에, ‘서류상 증빙될 수 있는 가족’ 수준으로 해석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다. 지금은 축소할 수밖에 없더라도, 차별금지법·생활동반자법을 만드는 데 꼭 함께하여 좀 더 많은 관계들이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자고. 가족이 없는 사람도 돌봄에서 소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피켓을 보았다.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동성애 확산된다.” 별 걱정을 다 하신다. 장담컨대 절대 확산되지 않는다. 그냥 지금까지 이름 없던 관계들, 하지만 실재하는 여러 관계들에 정당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뿐이고, 존재가 지워져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드러날 뿐인 것이다. 보이지 않았던 존재와 관계가 드러나서 마치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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