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의무처럼 권리처럼

국제신문 2022. 6.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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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 잉어가 뛰어오르는 천변. 노란 금계국이 사방을 물들이고 있군요. 옹기종기 모여 자신의 색을 막 지우기 시작한 토끼풀꽃들 옆으로 분홍애기낮달맞이꽃도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걷다가, 엎드려 들여다보다가, 걸음이 더뎌집니다. 길 저쪽으로 새벽을 깨우며 달리는 응급차 소리. 누가 또 급하게 아플까요. 잔디밭에선 어르신들 몇 분이 천천히 홀을 돌고 있습니다. 몸 어딘가 조금씩은 불편한 듯 보이지만 딱, 공을 치는 소리는 맑고 경쾌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주치의는 말없이 한참을 모니터만 바라봤습니다. 모니터 속엔 초로의 여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된 채 수치로 떠 있겠지요. 운동은 좀 하느냐, 걷는 것만으론 안 된다, 체중을 더 늘려야겠다, 세상과 담을 쌓고 들앉아 있으면 느는 건 우울이고 빠지는 것은 근육이다, 어디 소속해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봐라. 걱정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주치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걸요. 마음은요.

다른 것도 그렇겠지만 운동은 때에 따라 자신에게 꼭 맞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한때 산을 타고 걷는 것에 자신이 있었지요. 매주 근교 산을 올랐고 주중에는 몇 시간씩 걷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습니다. 그러다 관절이나 뼈에 이상신호가 왔고 등산도 걷기도 멈춰야 했지요. 자연스럽게 집 안에만 머물며 운동량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근육도 사라지게 되었나 봅니다. 허송세월은 금방 쌓이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파크 골프. 그렇게 되어 나는 이 운동을 알았습니다. 주치의의 걱정을 들은 그가 나를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고 나는 새로운 운동의 매력에 빠져들었지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운동이라 나와는 멀다고 생각했던 골프. 하지만 파크골프는 국민적 운동으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을뿐더러 운동효과가 크고 돈도 거의 들지 않습니다. 국유지나 시유지에 공원처럼 조성해놓은 파크골프장은 대개 지역 파크골프협회에서 자치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부산엔 구마다 다양한 파크골프장들이 있어 서로 다른 매력으로 시민을 부릅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나 접근이 쉬운 곳을 주로 이용하지요. 주 4, 5일을 새벽에 나가 서너 시간 정도 홀을 도는데 심신이 크게 튼튼해졌어요. 빠져나가던 근육을 붙잡기 시작했고 삐걱거리던 마음의 관절까지 정돈이 되는 듯합니다. 몸에 근력이 생기니 마음에도 근력이 생겨 기운이 돌기 시작했나 봐요. 요즘엔 사는 일에 다시 조금씩 새 기척을 내고 즐깁니다.

노년이 되면 운동은 일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할 일이 없어졌으니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일만 남았습니다. 사는 날까지 좀 더 건강하게,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처럼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찾는 게 좋습니다. 건강에도 좋고 재미도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지요. 반드시, 규칙적으로, 적당하게, 꾸준히, 의무처럼, 권리처럼. 나를 살리는 건 나 자신이니까요.

오늘도 물과 차, 약간의 간식과 약을 챙겨 집을 나섭니다. 벌써 도착해 새벽을 가르는 어르신들이 몇 보입니다. 어떤 세월을 건너 여기에 당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 오래된 동지인 듯 서로를 반기고 챙깁니다. 간식도 나누고 삶에 대한 훈수도 들으면서 아직 무엇에든 초보인 나는 새로운 근력을 키워요. 생의 후반을 느긋하게, 그러나 뜨겁게 정리해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듬직합니다.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의 튼튼하고 질긴 관절이며 근육이지요.


건강보험공단의 발표에 의하면 파크골프를 하는 노년층의 의료비 지출이 낮아졌다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공을 치고, 천천히 걸으며 동료들과 웃는 것. 들꽃향기를 싣고 달려오는 바람에 전신을 맡기는 것. 이 또한 보약이 아니겠는지요. 굿 샷! 나이스 샷! 오늘 나도 처음으로 홀인원이란 걸 했습니다. 다정한 박수 소리 사이로 유쾌하게 햇살이 쏟아져 내립니다. 울울창창한 우리들의 여름이 다시 시작되는군요. 더 뜨겁게 살아야겠습니다.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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