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총기 문제와 미국의 실패
딱 하루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총기 규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약속에서 후퇴하는 데 걸린 시간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내가 해왔던 일과 내가 취할 수 있는 행정적 조치를 할 수 있고 계속 그런 조치를 할 것”이라면서 “그렇지만 나는 무기를 불법화할 수 없고, 신원조회 규정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으로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 등 21명이 숨진 텍사스주 유밸디를 방문했을 때 “뭐라도 하라”는 시민들의 항의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총기를 규제하려면 의회가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런데 미 의회는 일체의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에 가로막혀 10년이 넘도록 유의미한 총기 규제 법안을 한 건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총기 규제를 해봤자 법원에서 제동이 걸리기 일쑤다.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총기 문제에 관한 정치와 정부의 실패를 시인하는 무기력한 토로였다.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예외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의 기원과 역사 발전 과정, 정치 및 종교가 다른 서구 선진국과 다르다는 관념이다. 총기 역시 ‘미국 예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근대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데 미국은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권리를 보장했다. 헌법에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돼서는 안 된다”고 명문화했다. “무장이 잘된 규율 있는 민병대는 자유로운 나라의 안보에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인민이 폭정과 외침에 맞서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폭력을 나누어준 것이다. 그런데 총은 자유를 지키는 데만 사용되지 않는다. 미국에선 하루 평균 110여명이 총기를 이용한 자살 또는 살인으로 죽는다. 연평균 4만620명이다. 미국의 총기 살인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26배 높다. 미국은 인구 100명당 120점이 넘는 총기가 풀려 있다. 유통 중인 총기의 수가 전체 인구수보다 많다.
미국에선 총이 정체성과도 결부돼 있다. 총기 소유자들은 총을 방어나 오락의 수단을 넘어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신념의 상징으로 여긴다. 살상력이 과도한 총기와 대용량 탄창 규제, 전과나 정신병력이 있는 이들의 총기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신원조회 강화 등 합리적인 규제 방안마저 번번이 거부당하는 이유다. 오히려 그들은 나쁜 놈들에 맞서려면 착한 이들이 총을 더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전미총기협회(NRA)로 대표되는 이익집단과 총기 소유자들의 강력한 로비는 정치인들을 옥죄는 현실적인 권력이다. 여론조사에선 총기 규제 의견이 항상 높지만 정치자금과 표의 결집력은 총기 소유자 집단이 강하다. 보수 절대 우위 구도의 대법원은 기존 총기 규제까지 허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형 참사와 그에 따른 슬픔과 분노가 반복되지만 재발을 막기 위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면서 미국 사회는 냉소와 무기력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집과 학교, 거리와 공원, 슈퍼마켓과 쇼핑몰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데도 정부와 정치가 제도적 보완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총기에 관한 한 미국은 실패 국가로 향하고 있다.
김재중 워싱턴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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