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경의행복줍기] 내가 나로 사는 시간

2022. 6. 1. 00:1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 선배가 위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에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선후배들이 충격에 휩싸여 달려갔다.

과수원집 막내딸인 이 선배는 웃음이 많았고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다양한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스럽고 재미있게 풀어놓는지 늘 주변 사람을 즐겁게 했다.

이 선배의 남편은 아내의 낭만과 이야기를 천박하고 쓰잘머리 없는 시간 소모라고 외면했다.

'나 어디 있지?' 병든 이 선배는 '내가 나로 사는 시간'을 선포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선배가 위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에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선후배들이 충격에 휩싸여 달려갔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우리가 먼저 슬픔에 휩싸여 쩔쩔맸다. 그런데 이 선배는 꽃처럼 활짝 웃으며 우리 모두 유한의 삶을 사는데 정리할 시간을 주니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소개했다. 바로 ‘내가 나로 사는 것’. 제일 먼저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서 장바구니에 꽂을 거라고 했다. 호박, 양파, 고등어 한 마리 등 저녁 찬거리에 프라지아 한 다발이 들어가면 자질구레한 생활이 담긴 장바구니가 바로 화사한 꽃바구니로 바뀔 텐데 그걸 못 해봤다고 했다.

과수원집 막내딸인 이 선배는 웃음이 많았고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다양한 이야기를 어찌나 맛깔스럽고 재미있게 풀어놓는지 늘 주변 사람을 즐겁게 했다. 거기에다 이 선배는 매우 낭만적이었다. 언제나 깔끔한 흰 빛 린넨 식탁보와 작은 꽃병과 장미 한 송이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여행 중 만난 바닷가 낡은 철제 테이블에 린넨 식탁보를 덮고 장미 한 송이 꽂힌 꽃병을 놓고 커피를 마시면 비릿한 어촌 바닷가가 아름다운 지중해로 변했다. 벽지가 찢어진 허름한 식당도 이 선배 식 치장을 하면 품격 있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낭만이 생활의 고단함을 벗겨낸다는 걸 이 선배를 통해서 배웠다.

그런데 이 선배는 결혼과 동시에 달라졌다. 이 선배의 남편은 아내의 낭만과 이야기를 천박하고 쓰잘머리 없는 시간 소모라고 외면했다. 이 선배의 남편은 모든 걸 돈이 되는 일과 안 되는 일로 구분했다. 어느 날 이 선배는 모처럼 큰맘 먹고 산 갈치가 상한 듯해서 바로 시장 생선가게로 달려갔다. 주인은 생선냄새라고, 이 선배는 상한 냄새라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싸웠다. 그러다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갈치 한 마리 때문에 상대방 머리카락이라도 잡을 기세로 거칠게 싸우고 있는 자신. 돌아오는 길목에서 이 선배는 무릎을 꺾고 울었다. ‘나 어디 있지?’ 병든 이 선배는 ‘내가 나로 사는 시간’을 선포했다. 우리는 눈물을 참으며 박수로 격려했다.

과연 내가 나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른 잘 모시는 종갓집 맏며느리, 아이들 성적에 집중하는 극성스러운 엄마, 입사동기 중에 항상 먼저 승진하는 일 잘하는 업무부 김 과장,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늘 경마장의 경주마처럼 달리는 아버지, 태어나면서부터 효자여야만 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 내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갖게 되면 내가 나로 살 수 없다. 잠시 남의 옷을 빌려 입어도 불편하고 어색한데, 내가 나로 살 수 없다는 건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면 천체망원경을 한 대 사서 하늘의 별을 실컷 보는 일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면 시집 몇 권 사는 일부터,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잃어서 안타깝다면 매달 아주 로맨틱한 영화 한 편을 보면서 황량한 마음 밭에 작은 꽃씨를 뿌려 주는 일부터. 순간순간이라도 ‘내가 나로 사는 법’을 찾는다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조연경 드라마작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