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건..길고 지루한 지뢰 매설 작업 같아"
맹렬한 겨울밤 영하 30도 추위 뚫고
바이칼호수 걸어서 건넌 경험 등 녹여
최근 2년 동안 쓴 단편 아홉 편 실어
삶과 죽음 연루된 작품 유독 많아
문단에서 드물게 시와 창작 병행
"시 쓰기는 수류탄 던지기에 가까워"
이미 러시아에서 1년 정도 체류 경험이 있던 그는 2015년 겨울밤 바이칼호수를 걸어서 건넌 경험을 모티브로 하고 많은 상상을 결합해 2020년 단편소설 ‘트로츠키와 야생란’를 써낼 수 있었다.
소설과 시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 이장욱이 바이칼호수의 맹렬한 겨울밤 풍경을 극적으로 담아낸 ‘트로츠키와 야생란’을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창비)을 들고 돌아왔다.
먼저 표제작 ‘트로츠키와 야생란’은 주인공 ‘나’가 환경단체에서 모함을 당해서 그만둔 뒤 산에 갔다가 추락한 ‘너’를 몰락시킨 ‘그자’를 찾아서 계단에 밀치는 복수를 한 뒤에 러시아로 도망치면서 시작된다. 바이칼호수 섬 안의 트로츠키와 류다 부부가 운영하는 곳에서 생활하던 나는 마침내 너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 호수의 얼음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제목은 리처드 로티의 에세이 제목에서 따왔다.
―작품 속의 야생란은 여러 의미와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소설에서 어떤 반복적인 오브제를 쓸 때,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미리 정해 두고 쓰지는 않는다. 오브제들은 감각과 직관의 측면에서 작동해야 한다. 오브제를 너무 도식화해 사용하거나 이해하면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역효과가 있다. 여기에서 야생란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구체적 사건, 장소, 시간 속에서 각각 다양한 맥락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령 산에서 발견한 야생란은 비극의 계기지만, 집 안을 메운 식물들은 어떤 유폐의 풍경이다. 원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발화하는 야생란은 와일드 오키드, 영화 제목이고. 트로츠키의 온실에 있는 식물은 또 다른 느낌일 듯하다.”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작인 ‘잠수종과 독’은 교통사고로 숨진 연인 사진작가 현우의 사고와 연관이 있는 방화범 김정식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 공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사적 복수도 가능한 공은 김정식의 목숨을 좌우할 주사기를 들고 서 있는데.
―의료 현장이나 의사의 모습이 구체적이다. 디테일을 어떻게 확보했나.
“쉽지 않았다. 알고 있는 의사가 있어서 집필 과정에 여러 번 도움을 받고, 나중에 다시 디테일에 대해 감수를 받았다. 제가 알 수 있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검사를 받고 또 요청을 해서 다시 수정을 받고 했다.”
“저의 경우, 현실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소설 인물을 구상하진 않는다. 현실에 실제 모델이 되는 인물이 있으면 아예 인물을 바꿔 버린다. 곽정희 역시 실제 모델이 있지 않다. 곽정희의 경우 박정희 시대의 전형적인 캐릭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곽정희라고 하는 인물 캐릭터의 내면이 더 중요했다.”
―이번 소설집에 죽음과 삶이 연루된 작품이 유독 많은 이유는.
“삶과 죽음, 기억의 문제는 저만의 소재나 주제라기보다는 문학 보편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다룬 삶과 죽음 또는 기억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 소설들은 시대적 변화나 역사적인 문제들과 더 밀접하게 연관됐던 것 같다. 2010년대 이후 역사적인 흐름 같은 것들이 격렬하게 변화해 왔고, 이런 것들이 저도 모르게 반영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일상생활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297쪽)라고 말했다.
“시는 수류탄 던지기에 가깝고, 소설은 길고 지루한 지뢰 매설 작업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때로는 둘 다 적군이 자기 자신이라서 당황하기도 한다. 시는 밤의 장르, 소설은 낮의 장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실제로 밤낮을 구분해서 쓰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시와 소설을 동시에 쓰면서 이제 시와 소설의 구분이 확실히 되는 것 같다. 소설에겐 좀 미안하지만, 소설이나 소설가는 직업의 이름이고 시나 시인은 직업이나 청탁과 무관하게 평생 하겠구나 하는 믿음이 있다. 시는 삶의 구체적인 생활 바깥의 글쓰기라면, 소설은 직업이라는 느낌이 있다. 시는 인간의 일이고, 소설은 소설가의 일이라는 느낌이 있다.”
당장 닥친 마감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여서 장기 구상도, 죽고 나서 어떤 작가로 기억된다는 것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늘 바쁘다. 왜냐하면 그는 ‘지루한 지뢰 매설 작업’(소설 쓰기)은 물론, 치열한 대치 속에서 끊임없이 ‘수류탄 던지기’(시 쓰기)도 늘 하고 있으니까. 더구나 벌써 경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그것에 온통 사로잡혀서.
그러면서도 현장의 작가기에, 그는 작가적으로 늘 걱정하고 고민한다. 벌써부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쓰고 나서는 또 강박적으로 쓴 글을 혐오도 할 것이다. 이렇게 후진 걸 누가 읽지, 이거밖에 안 되나, 소설 정말 못 쓰는구나, 창피하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홀로 마시는 술잔 속에서 도저한 자기혐오를 완화하고 최소한의 자기애정을 상승시키면서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 그를 만날 것이다. 여전히 펜을 꽉 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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