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웃음 빚어내는 언어와 리듬[문화프리뷰]
2022. 5. 31. 16:16
정제된 움직임과 세련된 오브제 그리고 잘 훈련된 몸짓 언어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한국 극단을 꼽으라면, 임도완 연출이 이끄는 사다리움직임연구소가 있다. ‘극단’이 아니라 ‘연구소’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은 단순히 몸을 잘 쓰는 극단이 아니다. 창단 초기부터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이 보여지는 형식을 연구하면서 이를 다양한 움직임과 이미지로 무대 위에 구현해내는 실험과 시도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공부하고 탐구하는’ 극단이다.
〈보이첵〉, 〈벚나무동산〉 등 초기작부터 〈크리스토퍼 논란클럽〉, 〈카프카의 소송〉에 이르기까지 비극과 희극, 신체극을 오가며 다양한 실험을 이어오고 있지만, 이 극단의 핵심은 코미디에 있다. 이들의 코미디 작품은 단순히 관객을 웃기려 하기보다 어떤 때 웃고 왜 웃는가를 연구한 결과물들이다. 때문에 작품 곳곳에 웃음의 타이밍과 움직임에 대한 고찰 그리고 웃음 뒤에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오랜만에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한여름밤의 꿈〉 역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특히 16세기 영국 작가인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어떻게 동시대의 한국 관객들에게 유쾌한 코미디로 다가올 수 있고,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지에 대한 정교한 고민과 연구로 이뤄져 있어 흥미롭다.
가면극과 마당놀이라는 우리 전통연희 양식을 셰익스피어 희극에 적극 들여온 점이 눈에 띈다. 원작에 등장하는 요정의 숲은 도깨비들의 숲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에 전통적인 봉산 탈을 이탈리아 가면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 풍의 반가면(半假面) 형식으로 재해석해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툇마루를 이용한 무대 공간을 배우들이 자유자재로 뛰어다니게 만듦으로써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니라 마당놀이가 펼쳐지는 멍석마당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가면과 무대보다 더 강력하게 관객의 웃음을 빚어내는 포인트는 배우들이 사용하는 구수한 언어다. 이들은 원작인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비류국의 네 남녀 미아, 두만, 혜령, 라업과 동양의 수호신인 금강역사 부부의 이야기로 바꿨다. 원작의 허미아를 미아로, 드미트리우스를 두만으로, 헬레나를 혜령으로, 라이샌더를 라업으로 바꾼 것만 봐도 어감을 살리면서 원작의 언어를 우리말로 치환하려 이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배우들은 130분가량의 공연 내내 셰익스피어의 길고 화려한 대사를 거의 줄이거나 생략하지 않은 채, 우리말의 리듬과 운율 속에서 더욱 생동감 있게 되살려냈다. 거의 모든 대사에서 각운과 압운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대사가 노랫가락처럼 흘러간다. 여기에 한국적인 신명을 더해 대사와 춤이 하나의 리듬 속에 어우러진다. 그동안 주로 신체를 사용해 움직임을 만들어온 사다리움직임연구소가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적인 언어와 리듬으로 무대 위에 새로운 움직임을 쌓아올리고 있다. 쉼 없는 이들의 탐구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무대다. 창단 단원부터 신입까지 모든 나이대의 배우들이 다 같이 참여함으로써 극단의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무대라는 점에서도 이번 공연의 의미가 남다르다. 6월 2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김주연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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