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묻곤 하셨다.."해태는 잘하냐?" [나와 너의 야구 이야기 10]

한겨레 2022. 5. 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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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의 야구 이야기]

어머니와 함께 떠났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가족여행. 본인 제공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한겨레〉 스포츠팀은 나와 너, 우리들의 야구 이야기를 전합니다. 당신의 ‘찐’한 야구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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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다. 떠들썩했던 개막전과 박철순 투수의 22연승 역투,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9회 만루 홈런을 직접 본 기억은 없다. 다만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이듬해 이사 간 집 방문에 가득 붙어 있던 오비(OB) 베어스의 우승 사진들이다.

그렇게 오비 베어스는 40년 동안 흔들리지 않을 내 첫 번째 우승팀이 됐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박철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베어스 어린이회원에 가입할 엄두는 못 냈지만, 어머니를 졸라 오비 로고가 새겨진 야구 모자 하나는 계속 쓰고 다녔다.

프로야구 전설 박철순이 2009년 6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시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머니는 전라남도 무안 출신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인 20대 중반에 서울로 올라와 아홉살 차이 나는 노총각 아버지와 선을 보고 결혼해 내리 딸 셋을 낳고 마지막으로 나를 낳으셨다. 18년간 중풍 든 시어머니 수발을 들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신 어머니는, 전라도 출신답게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셨다.

당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시위도 격렬해서 서울 시내에 최루탄 냄새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1987년 6·29 선언에 이어 열린 12월 대선에서 야권 단일화가 무산되면서 ‘양 김’이 따로 출마했고, 서울 변두리인 우리 동네에도 YS(김영삼)가 유세를 오기도 했다. 대선 당일 개표 방송에 상심하며 눈물짓는 어머니를 보며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정치 현실에 좌절하고 상처받은 호남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준 것이 프로야구 절대 강자 해태 타이거즈였다. 그 막강한 해태 왕조에 무참하게 패배하는 팀 중엔, 내가 응원하던 오비도 있었다.

특히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당한 역전패는 어린 내게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다.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앞서가던 오비가 5차전에서 패배했을 땐 해태가 정말 얄미웠기에, 이후 나는 항상 해태의 상대팀을 응원했다. 하지만 해태는 언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족족 상대팀을 무참히 짓밟으며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한화 이글스 장종훈이 2004년 6월13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엘지(LG) 트윈스와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친 뒤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그와는 반대로 오비는 1990년대 중반까지 최악의 암흑기를 거치며 하위권을 맴돌았고, 신생팀인 빙그레 이글스가 해태의 대항마로 떠올랐다. ‘홈런왕’ 장종훈으로 대표되는 공포의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함께 송진우·정민철·한용덕 등 뛰어난 선발 투수진을 갖춘 빙그레는 오비를 대신해 해태를 응징해 주리란 기대를 받으며, 나의 두 번째 응원팀이 됐다.

그러나 당시 해태엔 1985년 데뷔한 KBO 역대 최고 투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 있었다. 그를 앞세운 해태에 빙그레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심지어 1992년 한국시리즈에선 고졸 신인 염종석을 앞세워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3승2패로 겨우 이긴 롯데가 진출했는데, 빙그레는 힘없이 1승4패로 패퇴했다. 당시 혈관 수술을 받기 위해 어머니를 문안하러 병원에 가던 길에, 염종석을 서태지에 빗대 ‘염태지’라고 표현한 스포츠 신문 조간 기사도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 염종석이 2007년 5월24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기아(KIA) 타이거즈와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해태는 이후 ‘야구 천재’, ‘바람의 아들’로 불리는 이종범이 데뷔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하위권을 전전하던 오비도 1995년 명장 김인식 감독의 지도 아래 13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불사조 박철순 선수도 리그 우승에 일조했는데, 그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따라 하던 나는 허리 디스크가 파열돼 결국 수술을 받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 오비는 두산, 해태는 기아, 빙그레는 한화가 됐다. 정권은 민주당으로 교체됐고, 해태는 기아에 팔린 뒤 ‘엘롯기’로 불리는 약팀이 됐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려 고향인 무안에 내려가셨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셨다.

어머니, 외할머니와 찾았던 1980년대초 창경궁. 본인 제공

원체 몸이 허약했던 데다 허리와 고관절, 혈관 등 10여번 가까이 전신 마취 수술을 하신 어머니는 70대 초반 나이에도 몸이 많이 불편했다. 그래도 집 앞에 큰 공원이 있어, 저녁 시간에 함께 산책하는 게 우리 모자의 낙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야구 중계를 보면서 어머니의 팔짱을 끼고 걷던 그 시간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내가 야구 중계를 볼 때면 ‘해태는 잘하냐?’고 물으시던 어머니.

이후 공원도 없는 옆 동네로 이사하면서, 몇 년간 어머니는 거의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다 덜컥 담낭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다. 이미 수술은 물론이고 항암 치료를 하기에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저 몇 달 만이라도 더 사시기만을, 아니 큰 고통 없이 돌아가시기만을 바라야 할 절망적인 상황. 그때 나는 옆 병실에 나의 영웅이었던 박철순 선수가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는 체를 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두 분의 평안을 기원했다.

얼마 후 어머니의 임종일, 하필이면 그날은 2019시즌 프로야구 최종일이었다. 두산이 엔씨(NC)와 경기에서 이기면 극적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상황.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두산 박세혁의 끝내기 안타로 역전승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1시,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두산 베어스 박세혁이 2019년 10월1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엔씨(NC) 다이노스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친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언 3년. 정권이 바뀌었고, 기아 타이거즈는 다시 성적이 올라가고 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타이거즈는, 어느덧 내 세 번째 응원팀이 됐다.

이번에도 타이거즈와 민주당의 반비례 가설이 성립될진 모르겠지만, 여전히 야구는 정치와 함께 내 생활,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일부로 함께 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안암골 파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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